지금은 쇼핑몰이나 쇼핑센터란 말도 잘 안 쓰이고 코엑스몰 마냥 아예 브랜드 뒤에 ~몰 같은 걸 붙이는 시대지만, 1960~70년대는 아케이드(arcade)란 표현이 그럴싸한 느낌으로 등장했던 시대였다. 본래 연속적으로 늘어선 기둥 위에 아치형 지붕을 덮은 형태를 뜻하는 아케이드는 이러한 지붕 밑 통로에 늘어선 상점 거리를 뜻하는 표현으로 한자로는 덮개가 있는 길이라 하여 ’유개가로(有盖街路)’ 또는 연속해서 늘어선 상가라 하여 ‘연쇄상가(連鎖商街)’라 적는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케이드는 반도·조선 아케이드로 1965년 1월 24일 소공동에 개관했다. “민간외교와 관광사업의 산업화”를 꾀한다는 목표로 한 이곳은 토산품과 골동품, 명품들을 구비해 돈 많은 내국인과 외국인 관광객들을 끌어 모았고 개장식에는 박정희도 참석했다. 다시 말해 당시 바깥 돈 끌어모아 고도성장을 꾀하던 박정희 정권의 구미에 딱 맞아 떨어지는 외화 벌이용 고급 쇼핑센터였던 셈이다.
반도·조선 아케이드의 등장 이후에 신신 아케이드를 비롯해 아케이드라는 이름을 붙인 상가들이 몇몇 등장했다. 1967년엔 공원용지 침범과 사적지 미관 훼손 논란을 겪은 파고다 아케이드 건도 있는 등 아케이드 사업은 이래저래 잡음을 많이 동반했던 모양이다. 설상가상으로 국내 아케이드의 원조 격인 반도·조선 아케이드가 불과 개관 5년 만인 1970년 1월 17일 근처의 한 호텔 신축공사장 현장 사무소에서 시작한 불이 옮겨 붙는 바람에 삽시간에 전소당하는 대참사를 겪기도 했다. 그래선지 1970년대쯤 되면 새 아케이드의 건립 소식은 별로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런 분위기 가운데 거의 막차를 탄 곳이 소공 아케이드다. 장소도 바로 반도·조선 아케이드 바로 맞은편인 소공동 81번지. 소공 아케이드는 1970년 9월 24일자 경향신문 7면과 25일자 동아일보 3면에 한 단을 반으로 나눈 소형광고를 게재하여 시작을 알렸는데 그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고급상품취급점포 소공아케이드 10월 1일 개점, 1층에서는 금은귀금속, 시계, 카메라, 실크, 수예품, 인형, 목세공품, 자개세공품, 완구, 골동품 등, 2층은 남녀양품, 아동복 등 옷 취급. 특색으로는 ▷ 고급 상품 취급 ▷ 아케이드로서 최적 위치 ▷ 최고급 호화 실내 장식(전체 리크 장식) ▷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 취급 등. 일부 남은 점포 임대 신청 접수”
소공 아케이드가 자리한 소공빌딩은 한 때 수출왕으로 자리매김한 바 있었던 설봉(雪峰) 전택보 씨의 천우사 소유였다. 전택보 씨는 일제강점기 당시부터 사업을 해 왔던 인물로 해방 이후 북에서 월남해 1947년 3월 무역회사인 천우사를 설립했다. 전택보 씨는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조선 땅에서 도망치며 남긴 적산기업이었던 대성목재와 조선피혁을 인수하며 생산업에 손을 댔고 1964년부터는 4년 연속으로 수출실적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전택보 씨는 수출 실적으로 1968년에는 금탑 훈장을 받기도 하지만, 사채를 무리해서 쓴 여파가 돌아왔다. 창업 자금 500만 원부터 사채였고 계속해서 사채를 끌어 쓰며 사세를 확장해 온 결과 1967년 말에는 이미 빚이 102억 원이었다고 한다. 2018년 현재 시세로 치면 1조에 달하는 돈이다. 이로 말미암아 천우사는 1969년 6월 24일 3차 부실기업정리를 통해 6개 중 본산인 천우사 하나만을 남기고 몽땅 처분당한다. 그리고 그 남은 하나인 천우사의 본산 소공빌딩을 이용해 입대사업을 시작하기에 이르는데 1~2층을 아케이드로 만들고 3층을 사무실로 개조하기로 했다. 임대 보증금의 일부를 자금으로 융통하려는 계산이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시작된 소공 아케이드는 개장 이듬해인 1971년 8월 24일 경향신문 1면의 한 단에 광고를 내고 “국내 최초 악세서리 전문 백화점 드디어 개장, 참가업체 접수 중”이라고 알리게 된다. 광고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개장 목적 ▷ 국내 최초 악세서리 수출 견본시장을 만들고자 ‘악세서리 전문 백화점’ 개장 ▷ 개장과 함게 ‘국제 악세서리 비교 전시회’를 개최해 세계 각국 악세서리를 한 자리에 모아 국산 악세서리와 비교 검토케 함 ▷ 악세서리 생산자로 하여금 품질 향상 고취, 소비자에게 국산 악세서리의 우수성을 정확히 주입시켜 외래품 취향의 풍조를 일소시킬 수 있는 분위기 조성 ▷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는 상품유통망 형성”
이와 함께 1971년 9월 4일부터 이듬해 9월 3일까지 만 1년간 진행한다는 ‘국제 악세서리 비교 전시회’ 공지에는 국내에서는 악세서리 생산 업체와 수출진흥상품 판매 업체, 고전 악세서리, 지방 특산물 등을 취급하는 자들을 모집한다고 하며 외국에서는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등 12개국 업체들을 끌어올 것이라고 적고 있다.
구색 자체는 비단 악세서리만이 아니라 화장품과 양화, 조화, 가발 등 당시 수출 품목으로 인기 있던 것들도 들어 있는데, 여기서 주목해 볼 만한 점은 역시 아케이드 개장 당시만 해도 1단을 반으로 나누어 소박하게 알렸던 개장 소식에 비해 나름대로 힘을 주어 1단을 통으로 광고에 쓴 상황이다. 천우사가 마지막으로 재기의 희망을 꿈꾸던 당시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었다고 할까. 또한 취급 품목을 소개하며 붙인 말들 또한 당시 아케이드들에 쏟아지던 '돈 벌려고 심지어 일본놈에게도 굽실거린다'는 식의 비난도 조금은 의식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전택보 씨의 주 종목이 무역업이기 때문이어서였는지, 지금으로 치면 국제 초청 기획전 내지는 무슨무슨 페어 같은 걸 기획해 국제 교류를 꾀한다는 발상을 하고 있는 점도 눈에 띈다. 악세서리를 잘 알아서라기보다는 당시에 그게 돈이 된다고 판단한 결과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소공 아케이드는 국내에서 악세서리 전문 백화점을 표방하고 나온 최초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전택보 씨는 끝내 재기에 성공하지 못하고 1980년 7월 19일 심장마비로 급사했으며 천우사 또한 사장의 사망과 함께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졌다. 타이밍도 묘하게 소공은 물론 여타 아케이드들도 1980년대 들어 하나둘 사라지기에 이른다. 어쩌면 이 또한 박정희 시대 고도성장의 일면과 이면을 보여주는 한 사례가 아니었을지.
참고자료
한국목재신문 : 전택보 회장 <22>1954년, 대성목재와 조선피혁을 인수 (2005.11.22)
http://www.wood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8000
아시아투데이 : 금융재벌로 뜨고, 수출 1위 천우사는 몰락 (2011.05.23)
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483570
중앙일보 : 「아케이드」로 개조된 천우사 소공빌딩 (1970.09.11)
https://news.joins.com/article/1254953
중앙일보 : 천우사 사장 전택보 씨 별세
https://news.joins.com/article/154189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전택보(全澤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9726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 경향신문 1971년 8월 24일 1면 1단 광고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108240032920102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1-08-24&officeId=00032&pageNo=1&printNo=7967&publishType=00020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 동아일보 1970년 9월 25일 3면 소형 광고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009250020920301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0-09-25&officeId=00020&pageNo=3&printNo=15066&publishType=0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