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 멋대로 만평 100회 (8)

낙서 주제에 질을 생각하게 되다

by 서찬휘



백판만평은 시작부터 ‘화이트보드 낙서로 그리는 만평’이었다. 본질은 어디까지나 낙서였고, 내 그림 솜씨는 지금이라고 크게 나은 건 아니겠으나 그 때는 정말 볼 만한 게 못 됐다. 하지만 그런 수준으로 한 회 한 회 채워나가면서도 점차 표현 방식에 욕심을 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곤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멋대로 시작했지만 어느 사이엔가 달성하면 좋겠는 목표점으로 ‘100회’를 설정하게 됐다. 그리고 또 어느 사이엔가 나는 이 작업을 나름대로 ‘연재’로 여기고 있었다. 기왕이면 조금씩은 더 나아져야 했다. 사람 얼굴을 표현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고 특징을 잡아서 만화적으로 강조하는 방법도 익히게 됐다.


물론 작화 교본에 나오는 공식대로는 아니어서 제대로 그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점차 사람 얼굴을 그리는 속도도 조금은 빨라지기 시작했다. 제대로는 아니어도 부담 없이 그리고 지울 수 있는 화이트보드의 특성을 십분 활용해 많이 그리고 없애고 또 그린 덕이다. 안상수를 비롯한 몇몇 인물들은 이명박 외에도 곧잘 등장하며 나름대로 캐릭터화가 됐고 정당 상황을 반영한 캐릭터들도 등장했다.


하다 보니 표현 방식도 조금씩 다양해졌다. 화이트보드 마카로 칠한 뒤 긁는가 하면 면 장갑을 끼고 토닥여서 무늬를 내기도 하고 자를 동원하기도 했다. 낙서로 시작했는데 점차 동원하는 게 많아지는 것도 재밌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짧은 호흡 안에 담아내는 방식에 관해서도 점차 더 깊이 고민하게 됐다. 초반엔 인물을 그려놓고 말풍선을 얹는 수준이었지만 점차 그 안에서 이야기를 흘러가게 만들기 위해 무엇이 더 필요한가를 찾고 있었던 셈이다.


물론 여전히 갈 길은 멀었다. 텍스트로 주절주절 설명하려는 경향은 여전히 버리지 못했고 그림으로 설명이 다 안 되니 화살표로 얘가 누구고 지금 뭐를 하고 있다는 설명을 부연하기 일쑤였다. 인물 사진을 베껴 그리는 건 만평이 아닌데 그 선에서 머무는 일도 허다했다. 게다가 이제 와서 보건대, 딴에는 인터넷 개그나 오타쿠 개그 같은 걸 패러디한 회차들은 죄 실패작에 가까웠다. 이 점에서는 굽시니스트 작가의 감각이 정말 부러울 따름이다.


<본격 제2차세계대전 만화> 등을 그린 굽시니스트 작가의 패러디는 역설적으로 할 이야기가 명확하게 서 있는 가운데 외피에 진한 양념을 가미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데, 내가 적용했던 패러디는 원전을 모르면 이해가 안 될 법한 방식들 뿐이었다. 패러디는 알면 훨씬 재밌지만 몰라도 재밌는 선에서 적용해야 진짜다. 칼럼니스트로서의 나는 머리로는 알고 있었던 부분이다. 하지만 만화를 그리는 입장에서의 나는 그걸 몰랐고, 또 못했다.


그러니 사실 백판만평은 끝까지 만평이라고 부를 만한 수준은 못 됐다. 다만 그렇게 되어가고 싶다는 욕구 속에서 좌충우돌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뭐가 만평으로서는 질이 낮은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알고는 있는데 나오기가 수준이 낮게 나올 뿐, 그래도 알기는 한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았다. 알면 다음엔 안 하려 노력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한편 23회차 무렵부터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점차 칸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는 만평은 한 칸 안에서 압축해서 전달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 왔지만 조금은 이야기를 전개하는 재미도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백판을 세워 두 칸짜리로 전개하는 경우가 있었는데(23회, 33회 등) 점차 칸이 늘어나기 시작했고(40회, 45회 등) 아예 웹툰 스타일을 시도해서 화이트보드 15장 분량을 싣기도 했다. (68회)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만큼 많아졌다는 이야기인데, 어느 순간엔가 내가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은지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은지를 반문하게 됐다. 길게도 할 수 있음을 확인한 것까진 좋았지만 문제는 다시 원론이었다. 내가 지금 하려는 게 뭔지를 확인하는 것.


(계속)


23회차 <SD, "내가 권력 잡아 뭐하겠나"> 편(2011.01.17). <제멋대로 카이조>를 패러디한 개그.
33회차, <해적소탕 내가 시켰쪄요 뿌잉> 편(2011.01.24).
40회차, <박연차 게이트의 끝> 편(2011.01.28). 웬만하면 컴퓨터로 재편집하지 않는 게 원칙이었으나 이번 회차는 칸을 넘어가는 효과를 주기 위해 재조립을 좀 했다.
45회차, <과기벨트 백지화와 뒤바뀐 여야 반응> 편(2011.02.02). 정당 캐릭터들을 로고를 응용해 묘사했다.
53회차, <개신교 목사들 조계사 땅밟기 난동> 편(2011.02.12).
71회차, <삐친 이숙정과 표계산 바쁜 민주당> 편(2011.02.27).
75회차, <PD수첩 최승호 PD 강제발령> 편(2011.03.03). 게이 만화 한 장면을 패러디. 원전이 인터넷 개그로 널리 퍼지긴 했으나, 소재 선택에 신중했어야 한다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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