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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영선 Nov 08. 2020

테라오 겐 <가자, 어디에도 없었던 방법으로> (2)

It's Who We Are


2019년 6월 9일 씀


 지난 분량을 읽으면서는 내내 어린 시절을 함께 떠올렸는데, 이번에는 일 생각을 많이 했다. 머릿 속에 그렸던 테라오 겐은, 안아주고 싶던 꼬맹이에서 어느새 어른이 되었고 말 한 마디 걸어볼 틈도 없이 바삐 나아가는 걸 멈추지 않았다. Nulbarich의 It's Who We Are가 경쾌하게 어울린다. 심지어 뮤직비디오와도!

(발췌) 실패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그 방법은 잘못됐다든지, 이 방법이 더 좋았다든지. 그러나 실패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것이 아닐까?
 실패하면 부끄럽고, 상처받고, 후회한다. 그 단계를 거치고 나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이거다.'하는 마음과 만날 수 있다. 그 마음이 바로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다. 평소에는 자질구레한 기분에 휩쓸려 구분하기 힘들었는데, 기어이 알아냈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고 바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것이다.

 '실패'라고 하니까 최근에 국장님과 점심 먹으며 했던 대화가 떠오른다. 지금껏 자기가 맡아 했던 일들은 모조리 다 망했는데 국장이 되어있다니 웃기지 않냐셨다. 안 웃으려 했는데, 과거 우리 채널의 히트 프로그램을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한 것이 어쩌면, 유사 포맷을 구입해 지원자 풀을 분산시킨 자기일지도 모른다는 쭈굴쭈굴한 속삭임을 듣고는 웃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망한 프로젝트들을 헤아리며 하나 하나 접혀가는 국장님의 손가락을 보고 있자니, 나는 왜 국장님이 국장님인지 알 것 같았다.
 국장님은 잘 되는 걸 운영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없던 걸 만들고 망하고 수습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후자가 훨씬 더 어렵고, 동시에 더 큰 성장의 기회다. 국장님은 망할 때마다 ‘에잇 왜 나만 이런 일 줘. 나중에 나 꼭 돈 많이 벌거야.’(순화함) 생각하셨단다. 그리고 지금은 돈 많이 벌고 계신다. 하하.  

 회사에 다니면서 느끼는 건, 흥미롭게도 성공이나 실패가 선택적이란 것이다. 관행을 따르는 건, 안전하고 편리하다. 성공이라 부르기는 애매해도 실패할 가능성은 적다.

 그러나 지저분한 일들을 뜯어고치고 싶을 때, 거슬리는 것들을 도무지 견디지 못하겠을 때, 다들 슬슬 눈치보며 뒷걸음질 치는 일을 떠맡았을 때ㅡ나는 비로소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리고 나는 성공도 실패도 않는 것보다 성공이든 실패든 하는 것이 무조건 좋다고 생각한다.

(발췌) 디자인을 제대로 공부한 적은 없어도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알고 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형태를 손으로 그려내는 것이 디자인 작업의 시작일 테지. 그렇다면 일단 해보는 수밖에 없다. ... 구상이나 스케치만으로 물건을 완성할 수는 없다. ... 자를 대어 선을 그리고, 틀리면 지우고, 하나씩 크기를 계산해 수치를 넣다보니 귀찮아서 까무러칠 것 같았다. ... 내친 김에 찾아보니, 제도용 소프트웨어가 '캐드'란 걸 알아냈다. 나는 곧장 무료 시험판을 다운로드하여 설치하고는 서점으로 달려갔다. ... 그렇게 완성한 도면 몇 장을 손에 들고 나는 공장을 다시 찾았다.

(발췌) 서버를 임대하고, 'balmuda.com'이라는 도메인도 취득했다. 이걸 IP주소에 연결하고, 아파치로 설정하고, 데이버베이스가 어떻고...... 이게 다 무슨 소린지,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읽으면서 와하하하 웃음이 날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아니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담!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테라오 겐 역시 귀찮아 죽겠고 때려치우고 싶었던 적이 있었단 것이다. 그래도 참고 끝까지 했다는 게 멋있다.  

(발췌) 황급히 공기와 유체역학에 관한 개발에 착수했다. 당연히 그에 대해 아는 건 전혀 없었다. 나는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유체역학에 관한 책 세 권을 사와 단숨에 읽었다.
 그때 유체역학의 기초를 어느 정도 익혔는데, 무엇보다 유익했던 내용은 세 권 중에서도 가장 전문적이고 읽기 어려운 책에 나와 있었다. 그 책에서는 유체역학으로 밝혀내지 못한 현상이 아직 많다고 했다.
 뭐야, 그런 거였어? 학자도 모르는 게 많다니!
 넓은 범위에서 보면 나나 그들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 피차 모르지 않나. 초심자라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자유롭게 생각하면 되는거다.

(발췌) 그렇다면 어째서 ... 자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왜 부드럽고 기분 좋게 느껴질까? 나는 ... 공터에 풍속계를 세워두고 자연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변화를 관측했다.

 내 사수는 내게 '나는 이러지 말아야지'의 가르침을 숱하게 남기고는, 내가 입사한지 1년쯤 되었을 때 다른 팀으로 전배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는 진작 전배를 희망하고 있었는데 뭐가 잘 안 풀려서 1년을 더 머물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내가 얼마나 귀찮았을까? 히스토리를 모르던 당시에도 이미 인간적인 부분은 진작에 기대를 버렸다. 그러나 업무적인 면에서는 매달려서라도 배워야한다고 생각해 부당한 일도 군말없이 하고, 팀장님이 이거 안 배웠냐고 하면 고자질하는 게 될까봐 우물쭈물하며 죄송하다고 하던 그런 바보 시절이 있었다.

 모르는 걸 물어보면 귀찮아하고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해서, 궁금한 걸 모아뒀다가 기분이 좋아보일 때 간신히 물어보곤 했다. 그런데 어느샌가 알게 되었다. 사수가 내 질문을 싫어하는 이유는 자기도 모른다고 말하기가 싫어서란걸. 사수는 조직 내의 권력 구도에만 빠삭할 뿐, 송출 프로세스라든지 심의 법규 개정 같은 건 전혀 몰랐다. 굳이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에 가까웠다. 뭐야, 그런 거였어? 사수도 모르는 게 많다니! 그럼 내가 스스로 자유롭게 알아봐도 되는 거잖아!

 내 생각에 일이라는 건 본인이 어떤 자세로 임하느냐에 따라 그 범위가 달라진다. 사수에게는 송출 프로세스나 심의 법규 개정이 레귤러 업무 처리와 아무 연관이 없었겠지만, 내게 그것들은 무척 중요하다. 앞으로는 글로벌 생방송이 더 많아질 거고, 심의 법규는 미디어 환경의 급속한 변화로 인해 더욱 모호하고 적용하기 애매해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술국 사람들에게 그 장비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려줄 수 있냐는 부탁을 하기도 하고, 심의 법규 가이드를 얻어 읽고 영등위에 전화를 걸면서 불완전성을 최소화하고자 노력한다. (사수는 지금 다른 팀에서 잘 일하고 있고, 나는 우리 팀 일이 꽤 재미있다.)

 테라오 겐이 유체역학 공부와 바람의 변화를 관측하는 데서부터 시작한 것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정직하게 느껴진다. 당장 회사가 망해버릴지 모를 위기에 처했는데, 공터에 가서 주섬 주섬, 챙겨온 풍속계를 두고 그걸 주의깊게 바라보고 있는 사장님이라니. 그러나 어려운 상황 속에서 패닉에 빠지지 않고 절실함을 쥔 채로 착실하게 일해나가는 모습에서, 그의 강인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게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발췌) 가스가이 제작소에서 한 경험 중에서 무엇보다 중요했던 건 물건의 형태가 바뀌어갈 때 필요한 에너지를 내 몸으로 직접 느낀 게 아닐까 한다. 금속을 깎을 때 기계에서 나는 소리는 상상을 초월한다. 금방이라도 고막을 찢어버릴 듯한 굉음이다. 고속으로 돌아가는 초합금 칼날이 부품을 깎아낼 때는 그동안 경험해본 적 없는 저항을 온몸으로 느꼈다. 일반적으로 단단하다고 알려진 금속이 가공 면에서는 비교적 부드럽거나 끈적거리기도 했다.

 나는 내 손으로 뭔가 만드는 걸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이 부분을 읽을 때 특히 재미있었다.
 섬세하게 제작된 물건도 물론 아름답지만, 직접 만들거나 커스텀한 물건이 더 예쁘다. 어릴 적부터 내 마음에 쏙 드는 기성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내 머릿 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인데 내가 아직 안 만들었으니까.

 전에 친구랑 이야기하다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아끼는 야상에 얼룩이 생겨서 그림을 그리려고 패브릭 물감을 샀다니까, 친구가 세탁소에 들러 이 얼룩 제거할 수 있겠냐고 묻는게 순서 아니냐고 했다. 그러네! 난 왜 그 생각을 전혀 못했지?   

(발췌) 오랫동안 음악을 해왔던 입장에서 봤을 때, 이건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소속사로부터 월급을 받고는 있었지만, 음악으로 현금을 벌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데뷔하고 인기를 얻어야 음악만으로 먹고 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는 제품 하나가 팔리면 그만큼의 돈이 들어온다. 물건과 화폐의 교환, 이 얼마나 명료하고 알기 쉬운 시스템인가!

 지금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있으면서, 크게 공감했다. 나는 제조업을 좀 동경한다. 물건을 만들어서 판다는 단순한 사업구조도 그렇고, 판매량이라는 똑 떨어지는 성과 지표가 있는 게 멋있다. 무엇보다 직접 손으로 만져지는 물리적인 그 무엇으로 내 노동을 대상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다.
   
 사에구사 타다시는 <전략 프로페셔널>에서, '업계의 특수성'이나 '지역의 특수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새로운 사고방식/새로운 전략에 대한 조심스러운 저항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그 문장에 괜스레 뜨끔해서, 가급적 '업계의 특수성'이라는 말을 안 쓰려고 하는 편인데 그래도 테라오 겐이 느꼈던 저 명료한 시스템에 대한 감탄에는 공감 백배였다.

(발췌) 터져버릴 것 같아. 튕겨 나갈 것 같아. 이게 살아 있다는 걸까? 너무 멋진걸.

 이런 건 말이지, 읽으면서는 긴 들숨을, 잠시 멈췄다 눈을 감고 몸 안에 속속들이 감동을 채워넣곤 그제서야 날숨을 쉬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좋아서 휜 눈을 떠, 소리 내어서도 한번 읽어줘야지. 저 마지막 ㄹ에서 한참이나 멈춰있었다.


(발췌) "왜 이렇게까지 잘해주시나요?"하고 묻는 내게 그는 "이렇게까지 열의를 다하는 사람을 본 게 처음이라서."라고 대답했다.

(발췌) 뭐야, 여기였어? 여기라면 잘 알고 있지!

 읽고나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테라오 겐은 뭘 해도 했을 사람이란 것이었다. 락스타에서 제조업 CEO가 된 이 색다른 커리어만 봐도, 발뮤다가 아녔어도 이 사람은 어찌 됐건 뭔가 해낼 사람이다. 그 불굴의 추진력은 정말이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이 사람만의 독특한 능력이다. 품은 열의만으로 타인의 마음을 감화시키는 뜨거운 마음이란 건...

(발췌) "테라오 군, 회사가 망하면 어차피 돌려주지도 못해. 돌려줄 때는 테라오 군이 부자가 됐을 때야. 그깟 돈, 언제든지 괜찮아."
 부모나 형제, 아내와 아이들을 제외하고 진심으로 나를 배려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동안 나에게 동료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함께 음악을 하던 밴드 멤버 정도였다. 가스가이 제작소의 세 사람은 동료라기보다 스승이다. 그때까지 나는 선배라든가 상사라는 존재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마루야마 사장은 인생의 선배였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의 기대에 보답하고 싶었다.

(발췌) 여태껏 그만큼 고맙고, 존경스러운 전화를 받아본 적이 없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진 않았겠지만, 나는 숨죽여 울고 있었다. 그걸 들키지 않으려고 최대한 짧게 대답한 게 다였다.

 다음으로는 어느 한 사람의 성공에 있어 주변인들의 도움이 필수적이란 걸 느꼈다. <예술가는 절대로 굶어 죽지 않는다>를 쓴 제프 고인스는, 예술가로서의 성공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뛰어난 감각이나 재능이 아니라 그의 작품을 인정하고 칭찬해주며 끊임없는 발전을 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커뮤니티'를 꼽는다. 마찬가지로 가스가이 제작소 스승님들이나 무라야마 사장님 같은 좋은 분들이 없었다면, 그의 이 남다른 인생 스토리는 자아도취에 빠져있던 어느 아웃사이더의 공연한 몸부림으로 끝났을 지도 모를 일이다.

(발췌) 글을 써 내려갈수록 내가 그들의 아이라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느꼈다. 막무가내였고, 지나치게 정열적이지만 나에게는 누구보다 위대한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제 몫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린 시절에 형성되는 자아 정체성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느꼈다. 위대한 부모님을 둔 테라오 겐을 보며, 오히려 부모님을 통해 긍정적인 자기 인식을 형성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친구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그런 친구와 아닌 친구를 구분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우리 어른들 모두가 어린이와 학생 친구들 모두에게 더 너그럽고 따뜻한 태도를 가져야할 수 밖에.

 그들 스스로가 그들의 빛나는 가능성을 믿고 자신있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들의 암울한 현실이, 성공 스토리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줄 색다른 장치에 불과하다고 여기며 이겨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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