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미셀러니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영선 Nov 19. 2020

수국

열아홉살 때 쓴 글

2008년 씀

- 내가 각별히 아끼는 글


겁쟁이고 바보같고  같은 
언제쯤 살살 흔들릴까
아빠한테 실로 묶어 이마  치고 뽑아달라고 하고 싶다
그리고나서  전에 살던  우물가 디딤돌 위에 서서
지붕 위로 던지는거야
까치야 하고 부른 다음에
  줄게   다오 말고 그럼 뭐라고 말해야되지
 
옛날 집은 새로운 탐험이 가득했는데
뒤뜰엔 대추나무 돌배나무 사과나무 고야나무 밤나무 앵두나무
 때는 이름들을 절반도 몰랐던 예쁘고 알록달록한 꽃들
 
단연 으뜸은 엄청나게  밤나무
 
밤송이에 찔려 으익 하면서도 신발로 꾹꾹 밟은 뒤에
살살살 발을 양쪽으로 벌려 밤송이를 스르륵 열면
굵고 단단한 알밤이 그득하게 들어차있었는데
 
생밤이 먹고 싶으면  자리에서 이로 겉껍질에 상처내고
슥슥 벗겨낸 뒤에 속껍질(우리집 밤나무는  특이한 품종이라
속껍질이 그냥 뚝뚝 떨어져서 먹기 좋았음) 없애고
 안에  넣어 오독오독 씹어먹고
아니면 주머니에 넣거나 작은 손에  쥐고
광을 열어  광주리 속에 두는거야
 
가을이 깊어지고 하늘이  새파래지면
잠자리들이 겉잡을  없이 많아져서 끔쩍 끔쩍 놀라게 되면
커다란 광주리는 테니스공보단 작고 골프공보다는 
반짝 반짝 윤이 나서 보기만 해도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밤들로 가득 채워지고
 
그러면 걔네는 송편 속에  속에 약식 속에서 먹히고
나머지는 단체로  쪄진  늦가을이랑 겨울
우리 식구 뱃속으로  없어지지
 
아련하고 소중하고 따뜻한 추억들
 
 18 때까지 살았던  집은
엄청 낡아서 때론 으시시했었지만
그래도    집에서 살아서 좋았어
 
대문 앞에는 길다랗고  돌이 놓여있었어
 위에는 수국이 있었고
 옆에 담을 따라 개나리가 있었고
 
그래서  수국을  좋아해
왜냐하면   위에 앉아 수국 아래서 책을 읽었거든
햇빛 아래서 책을 읽다가 집에 들어오면
갑자기 왠지 모르게 엄청 깜깜해진  같은 느낌이 들곤 했어
 
가끔 바람이 불어
 자체로도 하나의 꽃인 수국 꽃잎이 하나 둘씩 날릴 때면
마치 눈이 내리는 것처럼 아름답고 꿈결같았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