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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영선 Oct 14. 2021

소풍을 준비하는 마음

첫번째 여행지, 제주도 - 1편 



 아빠가 칠순을 맞은 해, 2019년. 우리 가족은 한 자리에 모여, 그동안 오남매를 먹여살린 가장의 무게와 노고에 비하면 한없이 가볍고 투명한 감사패를 선물해드렸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선물을 더 준비했다. <황혼의 허니문 초대장>을. 

넷째딸이 건네는, 황혼의 나이에 떠날 신혼여행 초대장. 


 

 50년생, 53년생인 우리 아빠와 엄마는 1974년 결혼하셨다. 전쟁통에 태어난 아빠와, 그 시절의 딸로 태어난 엄마는ㅡ 둘다 꿈도 재주도 많았지만 기회의 문 앞에서 좌절해야 했거나 혹은 차마 발을 내딛을 수조차 없었다. 타고난 성실함과 정직한 책임감으로, 오남매를 먹이고 입히며 길러내셨지만 정작 본인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에는 소홀하셔야 했다. 부모님의 일상은 일과 양육의 지속이었고(오남매는 터울이 5살, 5살, 5살, 2살이다.), 잠시 나만의 시간을 누리는 일 같은 건 산더미 같은 할 일로부터의 도피나 무책임이라 여기며 사셨다. 오남매 중 넷째딸, 그 ‘일과 양육 레이스’ 후반부에 속하는 나는 자연스럽게 ‘취업 후 하고 싶은 것’ 리스트 첫 순서에 ‘부모님 모시고 여행 가기’를 적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그 사이 여행의 난이도가 올라갔다. 평생을 빵돌이로 살아온 아빠에게 갑작스럽게 글루텐 아나필락시스 반응이 일어난 것이다. 처음 반응이 있었을 때, 운전 중이던 아빠는 교통 사고만은 안 된단 생각으로 간신히 의식을 유지한 채 주차한 뒤 하차하다 쓰러지셨다. 다시 정신을 차려 도움을 청하기 위해 건물로 들어가다 입구 계단에서 다시 실신하면서 치아들이 부러지고 말았다. 응급실에 실려갔다 의식을 회복한 아빠는 도로 멀쩡해지셨고, 그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서울의 큰 병원들을 돌아야했다. 그게 글루텐 아나필락시스란 걸 알게 되기 전까지 우리 가족은 모두 걱정에 잠겨있었다. 증상이 있을 때 허벅지에다 꽂을 에피네프린 주사기를 상비하고 나서야(꽂은 채로 응급실에 가야한다) 그나마 마음을 놓았지만, 여전히 부지불식 간 글루텐을 섭취하게 되는 일이 왕왕 일어난다. 


 엄마의 무릎 연골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취업 직후 엄마만 모시고 갔었던 일본 여행, 군마현의 쿠사츠로 가기 위해 신칸센을 타는 일정이 너무 무료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엄마는 걷지 않고도 창 밖 풍경을 느긋하게 볼 수 있어 무척 만족해하셨다. 도심지의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을 고되어하셔서 하루 한 포인트를 중간 중간 충분한 휴식과 함께 돌아보았고, 주로 나홀로 여행을 해왔던 나는 부모님과의 여행이 그와는 얼마나 어떻게 달라야하는가를 생각하게 되었었다.


 해물찜에 들어있는 떡이 밀떡인지 쌀떡인지를, 가려는 장소에 계단이 얼마나 많은지 중간에 앉아 쉴 곳은 충분한 지를 미리 헤아려두어야 하는 여행. 그러다보니, 친구들에게 추천 받거나 일반적으로 핫플레이스라 일컬어지는 식당이나 여행지는 자연스레 밀려나게 되었다. 오로지 이 <황혼의 허니문>을 위한 코스를 짜야만 했던 것이다.  





프로젝트를 만들면 로고 디자인하고 스티커부터 만드는 나.


 한번 여행을 다녀오고 말 거라면, <황혼의 허니문>이란 근사한 이름표를 붙일 생각을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나는 제주도, 태국, 호주의 순서로 여행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정작 나도 호주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우리끼리의 여행 경험을 미리 잘 쌓아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이미 가봤던 제주도와 태국에서 비교적 수월하게, 발생 가능한 상황들을 미리 겪고 학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호주는 광활하고 아름다운 자연으로 잘 알려져있고, 캥거루와 코알라같은 특별한 동물이 있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남반구라 계절이 반대인 것과 영미권 국가라 확실히 이국적인 느낌을 줄 수 있을 거란 점에서, 최종 목적지로 낙점하였다. 


 즉, 가장 난이도가 낮은 첫번째 여행지 제주도에서 부모님께는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심어드리고, 또 나는 앞으로의 여행을 위한 학습을 해야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여행을 즐기기가 어렵지 않겠냐고? 전혀! 나는 여기에 하나의 생각을 더하기 때문이다. 여행 자체에 충실하고 푹 빠져 즐긴다면, 둘다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라는 생각을. 


 <황혼의 허니문> 아이디어를 이야기했을 때, 주변에서는 다들 놀라워했다. 또래 친구가 '나에게도 너같은 딸을...'하며 너스레를 떨거나, 부모님이랑 해외 여행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는 경험을 나눠주는 친구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 오남매는 엄마 아빠를 모시고 쇼핑을 시작했다. 여행 가서 쓸 모자, 커플 티셔츠, 수영복 등등을 골라 사며 여행을 준비했다. 기분 좋은 명분은 평소보다 더 적극적이고 실험적인 쇼핑을 합리화해줬다. 특히 엄마는 덕분에 맘에 드는 새 수영복이 생겼다고 좋아하셨다. 엄마는 내 생각보다 더 많이 수영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툭툭 던져지는 그런 작은 힌트들로 나는 엄마 아빠의 모습에서 엄마 아빠라는 역할을 한 겹씩 벗겨나가며 그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차츰 차츰 알아갔다.

2017년 추석. 한복 대여를 예약하고 경복궁에 놀러가 사진을 잔뜩 찍었다.


 어릴 적 엄마는 내 소풍 날짜가 나오면 미리 장을 봐오시고, 입을 옷을 사주시고, 새벽같이 일어나 김밥 도시락을 준비해주시면서 어엿한 소풍날 차림을 완성해주셨었다. 여행지에서 카메라 앞 포즈를 취한 엄마 아빠의 모습을 상상하며 귀여운 차림새를 준비하고 챙기는 내 마음이, 어쩌면 엄마의 그 때 그 마음과 비슷한 마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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