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후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영선 Nov 03. 2020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필멸하는 것들은 결코 근절되지 않는다

2017년 6월 8일 씀


 내가 읽은 미시마 유키오의 두번째 책. (첫번째는 가면의 고백.) '탐미문학의 진수'라 일컬어지는 것 치고는 수수한 모양새다. 황토색 바탕에다 곰팡이색으로 연꽃 몇 송이에 불상의 얼굴 한쪽 인쇄된 게 전부인 표지. 그러나 다 읽고나니 이보다 이 소설에 걸맞는 디자인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답기' 그지 없다.

 아, 이 얼마나 합당한가. 말더듬이, 못생긴 얼굴, 꼬였으나 가지런한 성정을 지닌 인간이 최상의 美를 극도로 희구한다는 것이. 그토록 꿈꿔왔던 美의 화신, 금각을 마주했던 첫 순간에는 정작 '이것이 전부인가' 하는 허탈함을 느꼈던 나지만... 바라지 않았던 듯 바랐었던 첫 시도에서는 정작 그 금각이 젖가슴 앞에 떠올라 나타나버리는 탓에 불능 상태가 되어버리곤 했다. 몇 차례의 실패와 경멸의 눈초리를 버티고 나서의 성공은 예의 그 '이것이 전부인가'였을 따름이었다. 금각은 언제나 가장 높은 곳에 그 지붕 끝을 닿게 한 채로, 경탄이나 황홀이나 환희와 같이, 마땅히 가장 아름다운 금각에게 주어져야할 감정들을 느끼려고 할 때마다 번번이 고고한 얼굴로 나타나서 나를 꾸짖는 것이었다.

 세상과 나 사이의 번역가라고 믿었던 그 흰 셔츠의 쓰루카와에게, 그 소년다운 목소리의 "정말로 너는 그런 짓을 했니?"하는 물음에 나는 새빨간 거짓말을 해버린다. 세상 둘도 없는 비겁한 행동이었으나 누구 하나 손가락질 할 수 없는 합리화가 가능한 일이었다. 티 없이 밝고 맑은 쓰루카와를 보면서 나는 질투 한 톨 느낄 새도 없이 그저 아아 이런 순수한 인간이야말로... 하며 그를 좋아하게 된다. 그러니 그가 트럭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에 그다지도 슬퍼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자살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을 때 그렇게도 놀랐었던 것이다. 쓰루카와가 가시와기에게 전했던 마지막 편지에 적힌 이 글에 그렇게나 경악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 불행한 연애도 나의 불행한 마음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날 때부터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태어났다. 내 마음은, 환하게 밝은 세계를 전혀 몰랐던 듯이 여겨진다."

 여자 앞에서 나자빠지며, 그리고 스쳐지나가려는 여자를 무정하다고 비난함으로써 사로잡는 안짱 걸음의 가시와기는 나와 비슷하다. 쓰루카와보다 악하고 쓰루카와보다 비굴하고 쓰루카와보다 타락했으므로. "기묘하게도 그 때까지의 나는, 말더듬이라는 점을 무시 당하는 것은 바로, 나라는 존재를 말살 당하는 것이다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썼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시와기는 여자에게 자기의 흉한 안짱 다리에 입을 맞추라고 요구하는 인간이었다. 꽃꽂이 선생인 여자에게 배운 솜씨로 도코노마에다 근사한 꽃꽂이 장식을 만들어두곤 이제 필요 없으니 가버리라고 독설을 퍼붓는, 그리고나서 나더러 얼른 달려가 위로해주며 자고 오라고 귀뜸해주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퉁소 연주는 아름다웠으며, 그와의 언쟁은 수준이 높아 나의 깊이를 되돌아볼 수 있게 했다. 무엇보다도 나의 일탈을 위한 자금을 ㅡ마지못해ㅡ 융통해 준 인간이기도 했다.

 내가 잘 보여야만 하는 인간인, 나에게 꽤 호의를 베풀어 준 노사의 추악한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고 난 뒤 어떤 언급이나 해명을 해주길 바랐을 뿐이지만 노사의 신경을 긁는 것과 진배 없었던 나의 행동들은 끝내 금각을 '순리에 따라' 소유할 기회를 박탈시키고 만다. 그러나 나는 그런 노사가 끝내는 같잖게 여겨질 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금각을 소유하게 된 뒤에 나 역시 저런 모습이 될 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포동포동한 살덩이가 창녀의 몸에 닿는 모습을 그리며 토악질을 하기 보다는 그저 기이한 형상으로 여겼던 것 역시, 쓰루카와에게 거짓말한 나나 노사나 진배없다고 느꼈기 때문일 게다. 나의 자기 혐오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객관적인 것이며, 감정적이기보단 이성적인 것이었다. 내 경멸의 방식은 눈을 흘기고 침을 뱉는 것이 아니라 소리 없이 미추의 기준선 한쪽 방향으로 밀어두는 것이었다.

 "모름지기 생명이 있는 것들은, 금각처럼 엄밀한 일회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인간은 자연의 온갖 속성의 일부를 담당하여, 대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것을 전파하고, 번식시키는 존재에 불과하였다. 살인이 대상의 일회성을 멸망시키기 위한 행위라면, 살인이란 영원한 오산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금각과 인간 존재와는 더욱더 명확한 대비를 보여, 한편으로는 인간의 멸망하기 쉬운 모습에서 오히려 영생의 환상이 떠오르고, 금각의 불괴의 아름다움에서 오히려 멸망의 가능성이 느껴졌다. 인간처럼 필멸하는 것들은 결코 근절되지 않는다. 반면에 금각처럼 불멸의 것은 소멸시킬 수 있다. 어째서 사람들은 그러한 점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일까? 내 독창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메이지 30년대에 국보로 지정된 금각을 내가 불태운다면, 그것은 순수한 파괴,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며, 인간이 만든 미의 전체 무게를 확실히 줄이는 일이 된다."

 소이탄에 의해 녹아버릴 바에야, 태풍의 거센 바람에 훼손될 바에야, 누구보다도 금각을 사랑한 나로 하여금 불태워져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 美는 소멸이라는 단어와 함께 더욱 완전해질 것이다. 한국에서 동란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공습 사이렌을 마음껏 상상하던 그 때와 마찬가지로 이 세계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 반드시 그 전에 불태워야만 한다. 주도면밀한 준비 끝에 나는 금각이 불타는 모습을 바라본다. 자살에 대한 준비도 해두었다. 그러나 그 불꽃을 보며 나는 "살아야지" 한다.

 저기 내가 인용한 일부만 보더라도 작가의 천재적인 글재주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이 미시마 유키오는 다자이 오사무의 유약한 기질을 비난한 적이 있는데, 확실히 다자이 오사무보다는 단단함이 느껴지는 묘사를 사용한다. 무엇보다 다자이 오사무의 글을 읽고나면 나도 같이 모호한 괴로움에 시달리게 되는데, 미시마 유키오의 책은 건조한 우울함만이 찾아온다.

 말더듬이인 것을 알리지 않고는 나를 제대로 알게 한 것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중학생 시절 선생님이 나더러 참 밝고 명랑하다고 칭찬해줬을 때 나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교무실로 돌아가는 선생님의 옷소매를 붙잡고 "선생님, 겉으로만 그런 거에요."라고 말해버렸었다. 선생님은 사춘기 소녀의 자기 표현이라 여겼는지 하하하 웃고는 가버렸지만, 선생님이 마음에 드는 만큼 꼭 선생님이 내가 어떤 아이인지 알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그렇게 선생님 눈에 보이는대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착한 아이이기만 한 게 아니어도 신뢰하고 좋아해주길 바랐던 것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내 주변인들은 나를 쓰루카와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갑작스런 고등학교 동창의 연락은, 책을 읽다 네가 떠오르는 구절이 있어 보여주고 싶단 것이었다. "... 찰랑거리는 생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교무실을 바쁘게 오가는 그 처녀를 보면서, 존재의 빛을 느꼈다. 참으로 밝은 빛을 뿌리는 사람이구나. 저렇게 살면 얼마나 아름다운가. 스스로 행복하고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젊은이였다. ..." 나는 이 구절과 어울리는 내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리며 미소 짓기도 하고, 이와는 전연 반대인 시간을 되뇌이며 겸연쩍어하기도 했다. 이런 면에서는 쓰루카와와 같다. 사람들이 보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내가 영 딴판이라는 것이. 나에게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서이기도 하고, 잘 웃고 잘 우는 기질이 다른 사람들의 경계심을 쉽게 허물기 때문도 그렇다. 다만 내겐 가시와기 같은 친구가 없다는 게 다른 점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