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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영선 Sep 26. 2023

<마스터>

폴 토머스 앤더슨 (2013)


 네이버 시놉시스는 이렇게 적혀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젊은이들은 각자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나지만 프레디 퀠 (호아킨 피닉스 분)은 여전히 방황하며 백화점의 사진기사로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제조한 술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는 프레디는 술에 취해 유람선의 한 파티장에서 난동을 부리게 되고 다음날 그 자리에 있었던 랭케스터(필립 세이모어 호프만분)를 만나게 된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았음에도 서로에게 이끌리게 된 두 남자. 프레디는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코즈’ 연합회를 이끌고 있는 마스터, 랭케스터의 실험대상이자, 조력자이자, 친구로서 그의 가족들과 함께 머물게 된다. 하지만 프레디는 진정한 마스터라 믿었던 랭케스터 역시 자신과 다르지 않은 불완전한 인간임을 깨닫고, 랭케스터 역시 가족들로부터 프레디를 멀리하라는 경고를 받게 된다. 두 남자 사이에 균열은 점점 커져가고 아슬아슬한 관계는 점점 파국에 치닫는데…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소설에는 역할이 반전된 아버지와 아들이 나온다. 아들에게 의탁해야만 하는 무력한 아버지와, 실리에 따른 선택이긴 하지만 입은 은혜 없이 돌봄을 제공해야 하는 아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가 마음에 들어 처음부터 어머니나 딸은 생각지 않았지만, 나부터가 남자가 아니라서 심리를 묘사할 때 가끔씩 우뚝 멈춰서게 되는 때가 있었다. 때문에 위 두 남자에 관한 시놉시스는 영화에 대한 흥미에 더해 굳이 월요일 새벽을 할애할 만큼이나 내게 매혹적이었다.


 ‘랭케스터 역시 자신과 다르지 않은 불완전한 인간임을 깨닫고’의 대목에서 나는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연상했다. 절에서 늙은 스승을 섬기다가 그가 창녀의 몸에 입 맞추는 걸 본 이후로 수행을 청산해버렸던 주인공이 떠올랐다. 영화에서도 랭케스터와 남자들은 말쑥하게 차려입은 와중에, 벌거벗은 여인들과 (아내도 벗겨두고) 흥취를 즐기는 장면이 나오기는 한다. 그러나 딱히 그게 프레디를 실망시켰는가는 모르겠다.


 괴상한 독주 레시피를 인정해주고,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고 있음을 자인하게 하고, 오로지 나만이 너를 좋아한다는 걸 소리쳐 일깨우는 존재가ㅡ 프레디 입장에서야 뭐 그리 대단히 변태적이지도 않은 하룻밤의 분위기가 낙심으로 이어질 리가 없다.


 그러니 저항하고 위장하고 의심하면서도 벽과 창문을 도돌이표처럼 맥없이 오고갔던 것이다. 통제 불능처럼 보이는 프레디같은 인물에게 절대적이기는 오히려 손쉬운 데가 있다. 흘겨보지 않는 눈을 마주한 적이 드물기 때문이다. 엉터리로 군 뒤에도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프레디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을까. 본래 강함은 너그럽고, 약함은 사납기 마련이다. 사나운 프레디는 너그러운 랭케스터에게 약했다.


 나무위키에는 저 무의미해보이는 양 벽 오고가기에서 프레디가 뭔가 보이는 척 위장한 뒤에야 사이비 교주에게서 풀려나는 식으로 한 줄 서술되어 있으나, 나에게는 그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프레디가 웅얼거린 ‘나는 이 곳에 선택해서 있는 것이다’, ‘창문 너머의 것들이 느껴진다’하는 진술은 자기 주도성의 확인과 폐소 공포증의 치유 과정을 내비추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교착 상태에서 ‘~할 수 밖에 없다‘는 무력감은 크나큰 괴로움을 일으키고, 그 중 하나인 폐소 공포증은 벗어날 수 없다는 무의식에서 기인한다.


 이 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할 수 밖에 없다‘를 ’~하고 싶다’로 바꾸는 것이다. 가령 ‘돈을 벌어야 해서 퇴사할 수 없다’는 생각에 괴롭다면, 돈벌이가 내게 왜 중요한가 숙고해보고 그를 통해 내가 누리거나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음을 상기하면 된다. 내 의지에 따른 행동임을 확인하고, 때문에 언제든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들과 즐겁게 교류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돈이 필요하고, 일은 내게 돈을 주기 때문에 나는 일을 하고 있어’ 라면, 일은 나의 즐거움을 가능케 해주는 수단이 되어 기꺼이 감수할 대상이 된다. 만일 일이 주는 고통이 사람들과의 교류가 주는 기쁨을 상쇄할 정도라면 버리면 된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없고, 아무 선택도 하지 않는 것 역시 나의 선택임을 아는 것, 내 인생이 내 것임을 아는 것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숙고의 과정은 단순히 마음을 달래는 데에 그치는 게 아니라 책임감 역시 강하게 단련시킨다. 프레디가 창문 너머를 느꼈거나 혹은 느낀 척 함으로써, 가로막혀 있지 않고 원하면 그리 도달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훈련은 종료된다.


 그러나 저 숙고라는 것은 어떤 사람에겐 일평생 낯선 것일 수 있다. 저건 빈 칸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채워진 답안을 지우고 새로 쓰는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필요성을 느끼기도 어렵다. 미리 답이랍시고 적어둔 누군가들은 사회 규범, 미디어, 군중 심리 등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이다. 우리는 그걸 우리 자신이 쓴 것이라 착각하며 살아간다. 시험 쉬는 시간처럼, 남들과 맞춰보니 똑같아서 역시 답이구나 더더욱 안심하면서 살아간다.


 회의론자에 대항하는 랭케스터의 모습은 일견 사이비 교주 같기도, 정말이지 인간을 도우려고 함에도 좌절하게 되는 현자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 둘다다. 인간은 악이라고 믿는 일보다 선이라고 믿는 일에서 더욱 잔혹해지기 쉬우니까. 그래서 랭케스터 같은 인물은 훌륭하면서도 한편 위험해지기 쉽다. 아 그렇지만, 그렇게 구치소에서 악다구니를 써가며 서로 욕했어도, 막상 프레디가 오니 껴안고 뒹구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경계심을 녹이게 되지만서도...


 마스터 없이 살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결국 랭케스터는 프레디의 교화에 실패했을까? 남이 이름만 말해도 펄쩍 뛰던, 사랑하는 도리스가 심지어 아는 남자의 아내가 되어 애를 둘이나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도 차분했던 것. 하룻밤 상대에게 참을성 있게 프로세싱을 시도하며 너 정말 용기있구나 하고, 랭케스터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 랭케스터는 이미 프레디 안에 있어서 굳이 곁에 없어도 괜찮고, 이미 프레디는 아무리 기행을 일삼고 천방지축이어도 어쨌건 전과는 다른 인간이 되었다.


 랭케스터가 말하는 영혼은, 불교에서는 참나, 그 밖에 상위 자아, 초자아 등 다양한 용어로 일컬어지지만 핵심은 같다. 빛 혹은 사랑이라는 본질적 존재가 성숙해가기 위해 몸을 매개로 하여 삶을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한번 뿐인 인생이라는 말은 초시계처럼 너무나 절박한 기분이 들게 해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한 몫 잡아보려, 떵떵거려보고 싶어, 최대한 행복해지려 애쓰고 조바심을 내게 된다. 하지만 이 생의 내가 전부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이번 생의 나는 그저 나이고자 하는 것이 최선이 된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So live as if you were living already for the second time and as if you had acted the first time as wrongly as you are about to act now.


 프레디처럼 자제력이 병적으로 부족한 인간이 1회차 인생에서 그를 극복하는 것은 애시당초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까, 다음 생에서 다른 모습으로, 자길 끔찍이도 싫어하는 랭케스터를 간절히 사랑하는 누군가가 되어 고통스럽게 자제력을 기르고 이번 생에 그를 고생시킨 응징을 당할 지도 모른다.


 영화의 마스터는 분명 랭케스터지만, 우리 삶에서의 마스터는 친절한 사람, 다정한 사람, 험상궂은 사람, 또 내게 상처를 준 사람... 누구나가 누구나의 마스터가 된다.


 프레디는 영화 도입부에서는 모래로 된 여자를 범하지만, 마지막 씬에서는 옆에 나란히 눕는다. 어쩌면 언젠가는, 포근히 안아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언젠가의 그 모래 여자는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몰라서, 희망은 숨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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