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과 고요, 음과 음 사이의 공간에 대한 그들만의 해석
재즈를 대표하는 수많은 레이블 중 나는 ECM 레코드를 가장 손에 꼽는다. ECM은 그들의 철학을 고수하며 흔들리지 않고 52년 동안 자신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키며 휴지기 없이 꾸준한 활동을 보여주는 한결같은 레이블이다.
*레이블이란? 각각 뚜렷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음반 회사
Since 1969 ECM stands for pioneering and continuous music production under the direction of its founder Manfred Eicher.
1969년부터 ECM은 설립자 Manfred Eicher의 지휘 아래 선구적이고 지속적인 음악 생산을 의미합니다.
ECM 레코드 공식 인스타그램에 선언한 그들의 소개를 천천히 뜯어보면 ECM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단돈 500만 원이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만프레드 아이허는 말 왈드론의 <Free At Last> 앨범을 완성시켰다. 현재와 시세 차이가 있음을 가만해도 현재 메이저 아이돌의 앨범 제작비가 대략 2~3억 원에 육박하는 것과 비교하였을 때, 적은 금액으로 완벽한 시작을 알렸다고 할 수 있다. 예산이 적었음에도 해냈다는 것은 그가 촘촘하고 뚜렷한 계획과 디렉팅 능력과 사업적인 감각도 뛰어났으며 결정적으로 이 모든 것이 흔들리지 않는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문장은 캐나다의 한 매거진에서 키스 쟈렛의 ‘Facing You’ 앨범에 대해 앨런 옵스틴이라는 기자가 쓴 리뷰의 문장이었는데, 그 글을 보고 감명을 받아서 ECM의 모토로 쓰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저 문장처럼 ECM 레코드의 음악은 빈 공간이 많다.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고, 리듬/화성/멜로디로 관객들 (혹은 청자들)과 대화를 하는 예술이다. 화려한 빅밴드, 헤비메탈이 군중들과 시끌벅적 떠드는 서커스라면 ECM은 연주자와 나, 혹은 연주를 바라보는 나와의 독대이다.
ECM의 사운드는 트럼페터 마일스 데이비스 대표작 <Kind of Blue>와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의 초기 트리오 작품들에 담긴 녹음과 음악적 방향에서 착안했다. 빌 에반스 초기작에 영향을 받은 허비 행콕, 키스 자렛, 칙 코레아 등이 ECM의 수많은 앨범에 참여하는 등 ECM에서 앨범을 발매하는 뮤지션들의 음악에도 영향력이 닿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확고한 정체성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80년도 넘은 블루노트 레코드 레이블조차 1967년 회사를 헐값에 매각하고 초기의 운영 방향이 크게 흔들렸을 정도로 (현재와 지금의 블루노트는 다른 레이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규모 독립 레이블이 정채성을 유지하면서 운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는 사례이다. 규모가 작았음에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레이블의 철학과 존재의 이유를 초기부터 현재까지 일관성을 유지하며 운영되어 왔다는 것은 다시 한번 놀랍고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예술적인 앨범 재킷은 ECM의 철학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일관되고 절제된 고딕체 폰트와 Lo-fi 한 재킷 이미지는 담담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담고 있는 청각적 이미지는 그들의 앨범의 완성도를 더욱 높여준다. 시대를 초월한 예술 작품들이 그렇듯 ECM의 음반 커버는 미술관 전시를 통해 여러 차례 재조명되었다. 이탈리아, 영국, 독일에 이어 한국에서는 두 차례의 큰 전시회 ‘ECM: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2013년), ‘RE:ECM’(2019년)이 열리기도 했다.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은, 침착한 마음으로 천천히 인내심을 가지고 음악을 듣는 연습을 하길 바란다는 겁니다. 프로듀서의 가장 큰 자질이 듣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저는 ‘듣기 예술’도 있다고 믿습니다. 듣기를 통해서 서로의 문명화를 배울 수 있고 서로를 협력하는 방법을 알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만프레드 아이허 2013.09.03 인터뷰 중
ECM 레코드의 음악을 통해서 우리는 듣는 연습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요즘의 음악은 3초 안에 선택받기 위해 높은 음압으로 시작부터 때려(?) 박는다. 이는 오래 음악을 들을 수 없는 환경을 제공한다. 음악을 오래 듣지 못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오래 들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연주자(대화 상대)가 하는 이야기를 인내심을 갖고 천천히 들어내는 것. 그것이 ECM 레코드를 들어야 하는 이유 아닐까.
2019년에 있었던 ‘RE:ECM’에 다녀왔을 때는 재즈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어 지루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음악도 그때는 공허하게 느껴졌고, 재킷 또한 많이 비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제 삶을 비우고, 군더더기를 치우면서 더 또렷하게 들리는 것들이 많아졌습니다. 재즈에 본격적으로 발을 담그면서 다시 만난 ECM 레코드는 저에게 깊은 공감을 선사했습니다. 모쪼록 여러분의 삶에 방향에 ECM이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릴 수 있는 글이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