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을 믿으시나요 To.태진님
지금 이 편지는 회사 점심시간에 춘곤증을 이겨가며 쓰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20년 가까이된 샤-프 전자사전이 있습니다. 오늘도 가지고 왔어요. 어찌나 견고하게 만들어졌는지 새 것처럼 작동이 됩니다. 흐뭇해요. 당시엔 최첨단 콤퓨팅이 컴팩트하게 적용된 디지털 기기였겠지만 요즘엔 역설적으로 아날로그틱한 향수를 불러 일으킵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짠하게 느껴져서 제가 꽤 아끼는 보물입니다. 가끔 막막할 때 재미삼아 몇 개 단어를 검색해보곤 하는데요. 이번 주제인 “우연”을 넣어보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우연히‘와 ‘우연찮게’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요. '우연히'는 '우연' 뒤에 접미사 '-히'가 붙어 만들어진 부사이고, '우연찮게'는 '우연하지 않다'가 줄어 만들어진 '우연찮다'의 활용형인데요. 문법 공식적으로는 서로 반대의 뜻을 가지고 있어야 맞습니다.
하지만 ‘우연히’는 "어떤 일이 뜻하지 아니하게 저절로 이루어져 공교롭게"라는 뜻을, '우연찮게'는 "꼭 우연한 것은 아니나 뜻하지도 아니하게"라는 뜻을 나타내는 맥락에 쓰이고 있습니다. 오히려 비슷한 의미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지요.
우연이란 건 이렇게나 모호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니까 우연은, 우연이라고 보기에 우연이지 않은 경우도 많다는 것이지요. 이 것은 우연이 아닐까 하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분명 있었기에 저는 대체적으로는 우연을 믿습니다만 사실 저는 우연이 무섭기도 합니다.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우연은 충격적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일어났으면 안됐을 일들이 벌어지면 몹시도 그렇지요. 이 상황을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어려웠던 경험이 있습니다. 내가 조심했더라면, 내가 더 무언가를 했더라면 충분히 바뀔 수가 있었을 것이라는 후회라도 하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 도저히 우연이였다고 치부해버릴 수 없는, 그러니까 쉽게 덮어버릴 수도 없는 일들. 우연찮게 일어나는 그 슬픈 일들은 인과관계, 즉 나의 잘못이 어떻게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고선 견뎌내기가 힘든 수준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연을 믿지만, 필연을 선호합니다. 그게 마음이 편합니다. 언제 어떤 일의 원인이 될 지 모르는 저의 현재의 순간들을 조심히 쌓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다 진짜 우연찮은 행운을 맞이하면 이건 정말 우연인 것 같다고 겸손하게 말할 수 있는 담대함을 갖고 싶습니다.
태진님은 우연을 믿으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