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키리님에게
주제를 떠나서 언제나 고키리 님의 글솜씨는 저에게 큰 즐거움 입니다. 혹시 샤-프 전자사전에 단어를 검색 하셨을 때, 더욱 본질에 가까운 의미 전달을 위해 단어 간 미묘한 차이를 들여다 보셨나요? 저는 그런 편이에요.
그나저나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도 수 백, 수 천 번의 우연히, 혹은 우연찮게를 관통했기에 가능한 일이겠지요.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우연을 바라보는 우리 둘의 극명한 시각차를 비교하며, 그 가능성을 탐구해 보는 일도 저에게 무척 흥미롭습니다. 저는 '우연'이 주는 낙차 큰 변화구가 주는 진동과 균열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편이거든요.
얼마전, 유채꽃이 필 무렵 다녀온 제주도에서도 우연은 계속 되었어요. 제주 서쪽의 작은 마을 고산리에서 일주일 내내 지냈죠. 제주에서도 유독 서쪽에 치우친 고산리는 서울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 해습니다. 서울에서는 버스 도착 예정시간이 10분만 넘어도 택시 앱을 만지작 거리는데, 고산리에서는 20분 뒤 도착 예정 표시에도 여유롭게 앉아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거든요. 고산리의 느린 시간 덕분에 사전 조사도, 계획도 없이 떠난 여행 치고는 우연찮게, 혹은 우연히 좋은 동네에서 여행할 수 있었죠. 또 하나, 고산리에는 자그마한 떡볶이 가게가 하나 있어요. 특이한 것이 저녁에는 맥주도 판매해요. 워낙 떡볶이를 좋아하는 탓에 메뉴판에서 가장 인기 있을 것 같은 고산초 떡볶이를 시켰어요. 왠지 고산리에서만 자라는, 확인된 바 없는 영엄한 효능이 담긴 약초가 담겨 있으리라 예상했죠. 그러나 잠시 후, 사장님꼐서 여쭤보시더라고요.
“어른 맛으로 드릴까요?”
어떤 뜻일까 곰곰이 생각하며 대답을 주저하는 저에게 사장님께서는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주셨어요. 고산 초등학교 학생들을 위한 떡볶이라고. 아마 고추장보다 케첩 비중을 더 높이셨겠죠? 약초인 줄 알았다고 저의 작은 오해를 전달드렸더니 지금까지 방문한 수 많은 사람들 중 고산초를 약초라고 생각한 사람은 처음이라며, 서로 한참을 웃었더랬죠. 지금도 생각해보면 우연히 이 가게에 들리지 않았다면 이처럼 소소한 즐거움은 없었을테죠. 좋네요. 저에게 있어 우연은 직선처럼 보이는 삶의 바이탈 사인에 일순간 튀어오르며 삶을 연장해주는 심박동 같아요.
우연을 믿냐고 하셨죠?
네 저는 우연을 믿고, 매 순간 우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023. 04. 03. 우연론자 태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