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로 대화하는 방식
재즈는 지극히 개인적인 음악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연주자들끼리 완벽히 소통해내야 비로소 완성되는 이타적인 음악이기도 합니다. 재즈는 즉흥연주로 완성된 음악이며 각 시대의 연주자들이 재즈라는 기반 위에 자신의 악기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 즉 스윙(Swing)하고자 했던 것이 현재의 우리가 듣고 있는 재즈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재즈는 현대 음악의 모든 장르 곳곳에 숨어져 있으며 이를 발견하는 것이 저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재즈라는 음악에서제가 발견한 요소들을 하나씩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재즈는 미국에서 시작되었고 미국에서 완성된 음악입니다. 왜 미국은 재즈를 가질 수 있었을까요? 이는 미국의 건국 배경과 관련이 있는데, 미국은 세계의 헤게모니(hegemony)가 유럽에 있던 시기에 건국된 국가입니다. 정치, 사회, 문화가 유럽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이에 비하면 신생국가 미국이 가진 것이라고는 광활한 영토와 자원, 그리고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반사이익으로 가진 돈뿐이었죠. 미국이 가지지 못했던 것은 바로 오리지널리티 (Originality)였습니다. 이것이 '미국의 것이다'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 없었습니다. 에든버러 리뷰의 한 대주교 시드시 스미스가 '어느 누가 미국의 책과 연극을 보겠느냐고' 평한 것은 당시 미국이 가졌던 문화적 약점을 드러내 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이에 미국 내에서는 자연스레 오리지널을 찾게 되었고 주목하게 된 것이 바로 재즈였습니다.
초기의 재즈는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악평이 더 많았습니다. 당시 미국은 흑인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고, 남부는 특히 더 심한 차별을 받았던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잡것들의 음악이라는 둥, 교양 있는 사람들을 정글로 보내는 음악이라는 평가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코의 작곡가 드보르작이 미국의 음악을 평하길 '미국의 음악은 결국 흑인음악을 근간으로 해서 만들어질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흑인들이 음악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은 시대의 차별적 대우보다는 더 높은 가치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드보르작은 왜 흑인 음악에서 미국 음악의 발전 가능성을 보았을까요? 그렇다면 재즈를 탄생시킨 흑인들은 평소에 어떤 음악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미국에 유입된 흑인들이 출발하였던 아프리카의 음악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 음악의 특징은 '그루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폴리 리듬에서 탄생하였는데, 이는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나누게 되는 큰 축이 되기도 합니다. 폴리 리듬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드리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폴리 리듬 (polyrhythm) : 두 가지 이상의 리듬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아래와 같이 용어를 정리해보겠습니다.
박자 - 음악 전체의 시간을 균등하게 나눈 눈금
리듬 - 그 박자의 조합
그루브 - 그 리듬을 반복하는 것
두 개 이상의 타악기가 같은 박자 안에서 다른 리듬을 연주하여 혼합된 그루브를 만들고 그 그루브를 계속해서 쌓거나 반복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프리카의 폴리 리듬입니다. 흑인들은 폴리 리듬을 기반으로 기타, 베이스, 드럼, 건반으로 이루어진 리듬 섹션이 각각의 그루브를 만들어 내며 연주했던 것이 재즈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모여서 연주를 했을까요?
이는 연주가 흑인들이 힘든 노예 시기를 버텨낼 수 있었던 소통의 도구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음악으로 소통해야 했던 이유는 아프리카의 복잡한 언어, 다양한 부족 간의 경계선과 유럽인들의 흑인 노예 산업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흑인들이 유럽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점령당하기 전 아프리카에는 8000개 이상의 언어와 종족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럽인들에 의해 1900년 대부터(공식적으로) 아프리카 전역의 흑인들은 서아프리카의 흑인 노예시장에 모아 전 세계로 팔려나갔고 그 도착지에는 당시 미지의 땅이었던 아메리카 대륙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렇게 아메리카 대륙에서 만난 다양한 언어를 가지고 있는 부족들이 모였기 때문에 언어적인 소통이 될 리 만무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교회 가있는 시간에 공터에 모여 타악기를 두드리며 소통하며 재즈의 기반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1920년대 재즈는 댄스홀에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아직은 흑인들만의 음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재즈가 미국 내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던 시기는 1940~50년 대 비밥(Bebop)의 출현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 사보이 시대 (1920년대) 에는 단순한 리듬과 멜로디만으로 연주되던 형태였고, 그 형태가 반복됨에 따라 연주자들은 형식적인 연주에 대한 불만과 새로움에 대한 갈망을 즉흥연주라는 방식으로 풀어내기 시작했고, 그것이 비밥의 시작이었습니다.
비밥의 출현이 재즈라는 장르의 완성도를 높인 내부적인 요인이라면, 이것만으로는 재즈가 성공하지 못했을 겁니다. 외부적인 요인도 분명 존재했는데, 비밥의 붐이었던 1940~50년대는 냉전시대가 도래했을 때이기도 합니다. 당시 미국과 소련 사이의 Propaganda(선전활동)가 극에 달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로의 체제가 성공적인 체제임을 알리고자 했던 시기였습니다. 미국의 선전은 자랑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의 자랑 도구로서 재즈를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에 재즈 아티스트 (Dizzy Gillespie, Dave Brubeck, Louis Armstrong 등)를 해외로 보내 콘서트 투어를 열어주었고, 이것이 좋은 반응을 얻으며 점차 재즈가 세계로 뻗어나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재즈라는 장르는 몇 번의 탈피를 거치게 되는데, Art Blakey를 필두로 비밥보다 히트감이 더 부각된 하드밥이 출현하였고, 뒤이어 Miles Davis는 Kind Of Blue 앨범을 통해 Bluesy 한 불협들의 향연의 쿨 재즈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당시 Miles Davis의 스타일이 바뀔 때마다 재즈의 흐름이 바뀌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Chick Corea와 Herbie Hancock을 필두로 재즈와 백인들의 음악인 Rock이 만나고, 전자악기와 앰프를 도입하면서 이는 퓨전 재즈라는 형태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내 1980년대에 들어 할렘 거리에서 할아버지의 음악인 재즈를 듣고 자란 DJ들은 거리에서 재즈 LP를 샘플링하며 반복된 비트를 찍어내며 탄생한 것이 지금의 힙합입니다.
재즈가 짧은 시간 동안 보여준 다양한 변신들은 가히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이처럼 빠른 발전을 보인 문화 콘텐츠는 보기 드물다는 점 또한 재즈를 매력적이게 느껴지게 합니다. 장대한 역사를 가진 클래식 음악사와 미술사도 100년 단위로 연대기를 끊는 것이 보통인데, 재즈는 100년 남짓의 시간으로 완벽한 형태의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이는 재즈는 초기 발전의 정신인 새로움에 대한 갈망과 당시 흑인이 처했던 상황이 만들어낸 결실이기도 합니다.
글을 마치며..
재즈라는 방대하고도 복잡한 역사를 가진 그만큼 전문가에 준하는 지식을 갖고 계신 많은 분들이 많아 글을 쓰기 전에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혹여 잘못된 정보를 취합하지 않았을까, 오류가 발견되어 놀림을 당하지는 않을까 했습니다. 하지만 재즈도 인류가 만들어낸 하나의 현상이고 그 현상을 대하는 태도는 지식으로 대하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끝까지 글을 적어보았습니다.
재가 재즈의 매력을 알게 해준 성북구 DJ형과 제 옆에서 늘 좋은 것들을 소개해주던 선배에게 감사드리며, 부족한 글로 제가 재즈를 아끼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전달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