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있고 싶지만, 함께 있고 싶은.
사람들은 태양계의 행성처럼 자신만의 삶을 중심으로 궤적을 그리며 회전한다. 그리고 그들이 지나간 궤도의 흔적과 방향은 각자의 속도, 경험, 깊이에 따라 제각각이다. 그러나 지나간 길에 패인 흔적의 깊이와 넓이는 다를지라도 모두에게서 보이는 공통적인 한 가지 성질을 관찰할 수 있다. 그것은 어느 것에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존재의 요청, 오직 나답게 사는 자유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관계의 동물의 사명을 다하듯 끊임없이 관계를 지향하고 동시에 지양한다. 타인에게 끊임없이 받는 영향이 나답게 사는 것의 장애물임에도 말이다. 옥석을 고르듯 나의 궤도에 어울리는 관계망을 고르고 또 고른다. 끝이 없는 고르기 속 우리는, '숲을 이룬 나무는 시들고 이루지 못한 나무는 외롭다'는 자연의 이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지속적으로 관계를 갈망한다. 이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보인다.
관계는 나답게 살기 위한 필수 조건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답게 산다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목격되어야만 증명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관계 속에서 서로 용인할 수 있는 궤적을 가진, 상대에게 '왜'라고 물었을 때 서로가 참이라고 납득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대화가 이루어지는 관계를 찾는다. 즉 부딪힐 일 없이 나의 존재를 파멸로 몰아갈 가능성이 가장 적어 보이는 관계를 찾아 헤맨다. 사람들이 MBTI에 열렬히 반응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해 묶은 전래동화처럼 고리타분해진 혈액형과 별자리, 띠와 궁합, 사주처럼 불명확한 사출기에 나의 정보를 넣어 출력한 뒤, 자신의 존재를 타인에게 설명해줄 명징한 텍스트를 찾는다. 역시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관계를 고르는 과정이다. 이는 타인에게 나를 손쉽게 설명하고 관계 실패에 대한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노력으로 기능한다.
다시 한번 이 지점에서 목격되는 삶의 아이러니는 나답게 살기 위해서라면 관계에서 벗어나 홀로 온전히 존재해야 하지만 관계를 증명받기 위해서는 기꺼이 관계에 속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듯 썩었던 썩지 않았던 관계의 동아줄은 언제나 나의 허리춤에 감겨있다. 내가 ENTP로 존재하려면 ISFJ가 존재해야만 나를 설명하는 네 글자 알파벳이 성립돼 듯, 타인이 있어야 나로 존재할 수 있다.
결국 온전히 나답게 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만약 혼자 외딴섬에 눌러앉아 '나는 변호사이면서, 동시에 대통령이고 황제이다'라고 외친다면 그 직업들은 모두 존재할까. 어느 누가 '당신의 말이 맞다'라고 동의해줄 수 있을까. 그래서 존재는 타인의 목격과 증언에 의해 완성된다.
그리고 이쯤 되면 관계가 존재의 근본처럼 보인다. 기대를 품고 독야청청 홀로 존재하고 싶다던 역사 속 수많은 철학자들도 결국 책이나 글, 말로써 세상과 관계하고 죽음 앞에서 잊히려던 자신을 반성하듯, 삶을 함축한 유언이나 묘비명을 고민하지 않는가.
어쩌겠는가. 다행히 신이 인간에게 준 축복의 기능, (혹은 진화 과정에서 이뤄낸 유전자의 선택) 망각 덕분에, 우리는 삶에 수반되는 관계 뒤에 동반되는 권태로움을 잠시 모른 채 살아갈 뿐이다. 어린 날의 나를 두고 멀리 떠난 그 존재도, 내가 떠나온 그 어린 존재도, 그저 관계의 아이러니 속에서 나방처럼 맴맴 돌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