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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May 03. 2018

별에 대고 노래 부르기, 나의 글쓰기

- 나를 남기고 싶다.

서해안 초소에서 바다를 멀뚱히 바라보는 일을 했다. 군대에 있을 때, 나는 경계병으로 거의 근무만 섰다. 하는 일이라고는 밤에 초소까지 뚜벅뚜벅 걸어가서 자정에 교대를 하고, 다음날 해가 뜰 때 쯤 복귀하는 것 뿐이었다. 2인 1조 였는데, 그 짝은 바뀌지도 않아서 몇 개월 동안이나 같은 녀석과 초소를 지켰다. 거의 다섯 시간이 넘게 초소에 있으려면 무언가 떠들어야 했다. 그 후임과는 안해본 이야기가 없었다. 물론 여자 얘기는 빠지지 않았고, 서로간의 성적 취향도 공유했다. 사회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추억들, 가정 환경이라든가 가족관계도 공유했다. 흑역사는 물론이고, 꿈이나 진로같은 미래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회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이유는 사실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누구를 만나든지 이야기를 한다. 친구나 애인은 이야기가 잘 통하는 사람일 때 성립된다. 그냥 우리는 떠들면서 사는 것이다. 가끔은 떠들거리를 만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한다.


하지만 떠드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그 긴 밤을 대화로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리 둘의 대홧거리는 한 달이 가기 전에 떨어졌다. 해안에서 머무르는 남은 몇 개월간 그 정적은 결국 나 스스로의 몫이 되었다.

'생각은 실컷 할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은 나도 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생각밖에 없으니 무언가 실컷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생각의 재료가 없는 군대에서는 생각을 하는 것도 힘들었다. 새롭게 보고, 듣고하는 것이 있어야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거기에서 배웠다. 매일 매일 같은 풍경, 같은 사람들과 같은 일과를 진행하다보니 무언가 생각하고 싶어도 생각할 것이 없었다.


후임과 대화를 할 수도 없고,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로 그 긴 밤을 이겨내야 한다니, 이제 와서 말이지만 끔찍했다. 그래서인지 그 바닷가 초소에서 나는 하늘을 참 많이 봤다. 서울에서 볼 수 없는 별이 참 많이도 떠있었다. 별빛은 바람에 스치우듯이(윤동주의 표현처럼) 호롱호롱 흔들리며 반짝였다. 나는 그 빛을 보면서 그것이 몇 십 광년 전의 별의 모습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내 눈에 닿기까지 얼마나 먼 길을 날아온거냐고 나는 별에 대고 물었다. 별은 그저 가늠할 수 없는 과거의 빛을 나에게 쏘아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두려워졌다. 몇 십 광년, 몇 백 광년. 그런 단위의 생각을 하다보니 내가 100년도 살지 못한다는 것이 실감됐기 때문이다. 보통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덧없이 사라지기 싫었다. 별빛이 내 눈에서 흔들릴 때마다 아주 조금씩 늙고있다는 기분이 가득해졌다. 조금씩 조금씩 죽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고 별이 말하는 듯 했다.


글을 쓰는 건 그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무언가 남기지 않으면 내 삶이 먼 훗날 등장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한 명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다를 바가 없지 않겠니.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나는 쓴다. 놀이공원이나, 방송국 담벼락에 이름을 남기는 그 심정으로 나는 워드프로세서에 글자를 남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글이 쓰고 싶은 밤이다. 별 주제도 없이 키보드를 두드려도 무언가 써진다는 것을 신기해하면서 투닥투닥 정적을 쪼개는 글을 쓴다. 오늘도 이만큼 내가 남았구나, 하며 어떤 안도감도 든다. 글은 놀이공원의 낙서와 다르게 다시 찾아볼 수도 있다. 종종 나와 평생 무관한(앞으로도 무관할)사람들이 댓글도 달아준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그 별을 보던 시절의 군대 이야기로 돌아가야한다. 당시의 나는 별에 대고 노래를 자주 불렀다. 몇 십 광년을 날아온 별빛이 어떤 신호나 말걸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빛에 대해 답가를 부른 셈이었다. 내 노래가 그 별을 향해 몇 십 광년의 거리를 꾸준히 날아가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아주 먼 훗날, 나는 이 우주에서 사라졌어도, 그 별의 하늘에는 그제서야 내 노래가 울려퍼지지 않을까. 그러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나에게 글쓰기는 별에 대고 노래를 부르는 것과 심정적으로 일치한다. 나는 없어져도 글은 한동안 남으니까, 누군가의 마음에 웅웅 울릴 수 있다. 그 사람이 내가 남긴 글자들의 조합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면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마음의 동요를 느끼게 된다면 나는 그 순간 절반은 살아있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마음으로 쓴다. 게으른 시험 공부를 어설프게 하고, 이대로 잠에 들기 아쉽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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