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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May 18. 2018

'버닝'속의 상징들

- 이창동의 ‘버닝’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보면서 흥미로웠던 대목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보다 원시 수렵 채집인들의 행복도가 더 높았다는 해석이었다. 원시 수렵채집인들은 현대인보다 노동 시간이 현저히 적었고, 남성이 육아에 더 매진했으며,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도 훨씬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농경사회에 들어서면서 노동시간은 몇 배나 늘어났고, 끊임없이 발전하며 눈부신 과학혁명을 이룩하면서도, 인류는 여전히 강도 높은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교육과 경제는 불평등을 계속해서 재생산하고. 효율적이고 영악해진 사람들은 그 격차를 가속화한다. 그리고 전 인류에서 가장 젊은 세대인 우리는 그 결과 열심히 ‘버닝’하지 않으면 ‘번(Burn)’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영화는 버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청춘들의 삶을 시적인 비유로 우리 앞에 꺼내 보인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 버닝

1. 판토마임     

해미는 종수와 우연히 재회한다. 둘의 만남에는 낭만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짧고 촌스러운 유니폼을 입은 채로 해미는 나레이터 모델 일을 한다. 종수는 칙칙하고 땀에 배인 옷을 입고 마트에 물품을 나른다. 해미는 영혼없는 춤을 추면서 종수에게 말을 걸고, 종수는 땀을 닦으며 말을 받는다. 동창임을 확인한 둘은 지저분한 뒷골목에서 종이컵에 가래침을 뱉으며 술 약속을 잡는다.

해미는 고깃집에서 종수에게 판토마임을 보여준다. 판토마임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예술이다. 가질 수 있지만 가지지 않는 것은 선택이지만, 가지고 싶은데도 가질 수 없는 것은 결핍인데, 해미는 그 결핍에 아주 익숙해진 상태이다. 귤을 먹고 싶을 때면 언제든 귤을 먹을 수 있는 그녀의 비결은 ‘없는 귤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귤이 없음을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이는 ‘없는 희망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없다는 것을 잊어버려야 살 수 있는’ 우리의 청춘에게 아프게 와 닿는 상징이다.     

영화 : 버닝

2. 자위     

해미의 방은 북향으로 빛이 들지 않는다. 유일하게 빛이 닿는 시간은 하루 중 정말 잠깐의 시간인데, 그마저도 남산타워에서 반사되는 빛이다.

우리나라에서 빛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일조권은 아주 민감한 문제라서, 법적으로도 아파트와 아파트, 주택과 주택 사이의 사선제한을 둘 정도다. 그런 햇빛에서 배제된 채 살아가는 해미를 통해 우리는 누려야 할 많은 것들을 돈이라는 문제로 누리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의 삶을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게 된다.

태양의 직접적인 빛은 남향에 사는 기득권층이 독점하고 있고, 경제적 능력이 떨어지는 사회적 약자들은 부산물 같은 햇빛을 아주 일시적으로 공급받는다.

종수가 남산타워를 보면서 자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희망의 포기를 강요당한 이 시대의 청춘이 가지지 못할 것을 쳐다보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싸구려 만족에 기댈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 버닝

3.벤     

벤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시거와 같이 보인다. 코엔 형제의 작품 속 안톤 시거는, 사람들에게 동전던지기를 강요하고, 이유 없이 살해하는 악당으로 자연재해와 같은 인생의 불운을 상징한다. 우리의 인생에서 사고는 예기치 못하게 찾아오는 것으로, 어떤 악의 없이 우리의 삶을 흔들어 놓는다.

‘버닝’에서 스티븐 연이 연기한 벤은 현대 사회의 불평등, 시스템을 한 사람으로 은유한 것과 같다. 그는 재미를 추구하고, 부유하고,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존재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본주의이라는 시스템이 이와 같다. 누군가의 재미를 위해서는 누군가 착취당할 수밖에 없고, 부유한 사람들은 부를 안정적으로 대물림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소모되고 상처받는 사람들을 진정 위로해줄 사람들은, 해미와 종수처럼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 뿐이다. 게임의 승리자들은 그저 비웃듯이 시간을 함께 보낼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영화 : 버닝

4. 비닐하우스     

비닐하우스는 본디 생명의 성장을 촉진하는 공간이다. 기후의 특성상 자랄 수 없는 작물을 자랄 수 있게 해주고, 상품으로 키워낸다. 그리고 벤은 해미와 같은 사회의 약자들을 비닐하우스 취급한다. 응당 무엇인가 생산하고, 성장시켜야할 비닐하우스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 죄의식 없이 죽여버리는 것이다. 청춘은 비닐하우스다. 그 안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키워내야 한다. 하지만 종수와 해미처럼 희망을 잃어버린 청춘은 제거 대상으로 분류된다. 10분이면 타버리는 그 나약한 존재들. 그 비닐하우스는 사실 버려진 것인데도, 버려진 책임까지 스스로 져야한다.      


종수가 ‘벤’을 죽여버리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자신의 허름한 옷과 칼을 벤의 차 그리고 시체와 함께 태워버리고 떠난다. 날씨는 궂고, 종수는 벌벌 떨고 있다. 통쾌할 법도 한데, 씁쓸함만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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