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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May 16. 2018

피그말리온은 행복했을까?

- 영화 '루비 스팍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키프로스 섬에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가가 살았다. 당시의 키프로스 섬은 매춘 등 갖은 문란함으로 가득했다. 이를 혐오한 조각가는 현실의 여자들을 멀리하고 자신의 이상에 꼭 맞는 여인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곧 그는 그가 조각한 상아의 빛깔처럼 눈부시게 흰 여인을 만들어냈다. 살아있는 듯 했다. 피그말리온은 밤낮으로 그녀를 어루만지고, 키스했다. 그녀가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의 사랑은 병처럼 짙어졌다. 얼마 뒤 아프로디테는 그의 진심어린 열망을 받아들이고는 그 조각상을 여인으로 만들어주었다. 피그말리온은 그녀와 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영화 : 루비 스팍스

루비스팍스는 창작물인 이상형을 사랑하고, 실제로 만나게 된다는 점에서 피그말리온 신화와 같고, 소설가의 소설이 실제와 연결된다는 점에서는 ‘스트레인져 댄 픽션’, 귀욤 뮈소의 ‘종이여자’와 닮아있다.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상형이라는 점에서는 영화 ‘그녀(Her)’와 비슷하다. 러브스토리 버전의 ‘데스노트’ 같다는 생각도 든다.     


영화는 우리에게 ‘그래서 피그말리온은 행복했을까?’하는 질문을 던진다.     


조각상인 이상형과 살아 움직이는 이상형은 완전히 다른 존재일 수 있다는 것.   

   

우리는 누구나 이상형을 가지고 있다. 구체적이냐 두루뭉술하냐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으나 선호하는 연애 상대자의 스타일이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가 이상형을 설정하는 기준은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방식이다. 이상형이 현실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우리는 이상형을 설정할 때 복잡한 논리관계를 고려하지 않는다. 잘생겼고, 여행을 좋아하고, 사교적이고, 활동적인 스포츠맨을 마다할 여자는 없을 텐데 주말에 자신을 버리고 여행을 간다거나, 모임을 가진다거나, 운동하러 가는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 또한 없을 거다. 이처럼 우리의 이상형은 보통 양립할 수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나도 물론 그렇다. 쾌활하고 웃음이 많은 여자는 오랜 시간 나의 이상형이었지만, 그러면서도 내 글이나, 음악, 그림에 섬세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 감수성 풍부한 예술가형도 내 이상형이었다. 외향적이면서 내향적인 여자. 요약하자면 그랬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보면서 계속 혼나는 기분이었다. 나의 사랑, 나의 이기심, 나의 욕심 그런 것들은 눈앞에서 계속 펼쳐지고 그 앞에서 나는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너는 나를 멋대로 이미지화 해놓고, 거기서 벗어나면 비난하잖아.’ 주인공의 전 여친 라일라는 파티장에서 만난 주인공에게 이런 말을 한다. 늘 외롭고, 사랑에 실패하고, 여자를 모른다고 면박 듣는 ‘캘빈’은 그 자체로 나였다.      


‘비포 미드나잇’의 후반부에서는 제시와 셀린느가 호텔에서 심한 부부싸움을 한다. 제시는 셀린느를 비난하지만 이내 이런 말도 한다. ‘난 널 패키지로 수용했어.’ 셀린느의 장점과 단점 모두를 셀린느라는 이름으로 끌어안았다는 말. 사랑하는 사람 그대로를 수용했다는 말은 부부싸움 중에서도 로맨틱하다. 


하나님은 자유의지 없는 사람을 만들었다. 매일같이 로봇처럼 자신을 경배하는 모습이 지루해진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고 그들 마음껏 생활하게 했다. 그리고 인간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괘씸해한 나머지 지옥으로 떨구기로 했다.     

로봇처럼 하지마. 해놓고 로봇처럼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지옥에 보내는 하나님처럼, 영화 속에서 캘빈은 이 같이 모순된 모습을 보인다. 맹목적인 사랑은 피곤해하지만, 자신과 멀어지는 것도 용납하지 못한다.


그의 그런 모순된 마음은 마지막 시시각각 소설대로 변하는 루비스팍스의 충격적인 모습을 만들어낸다. 삐뚤어진 이기심과 욕심이 만드는 파멸을 보면서 우리는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사랑은 타인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해야 한다는 것. 영화는 딱 그 말을 전한다.     


사랑은 나와 다른 누군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라는 말.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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