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댐 Sep 17. 2018

‘죄 많은 소녀’를 보는 네 가지 렌즈

- 영화,‘죄 많은 소녀’ 리뷰

영화는 죄를 다루고 있다. 이 시대, 이 땅의 죄다. 죄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와 땅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죄를 어떻게 다루는 지에 대해서 말한다.


나는 네 가지의 이야기를 소개하려는 마음으로 워드프로세서를 켰다. 이 영화를 볼 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들. 네 개의 렌즈를 겹쳐서 보면 영화는 조금 더 선명해질 것이다.         


(스포일러를 배제하려고 최대한 노력했으나 내용이 조금 드러날 수 있습니다.)     

영화: '죄 많은 소녀'

1. 논리로 진실을 밝힐 수 있는가?     


나의 흑역사 하나를 소개해야 한다. 나는 열 살부터 스무 살 까지 교회에 다녔다. 고등학교 2학년, 내가 중·고등부 회장을 맡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일요일 아침, 지하에 있던 예배당 문을 열었더니 삼겹살 냄새가 진동을 했다. 예배당의 모든 곳이 고기 기름으로 미끌미끌했다. 전날 밤 환풍이 안 되는 지하에서 누군가 고기를 구워먹은 것이었다. 냄새는 거의 일주일동안이나 빠지지 않았고, 기름은 아무리 닦아도 미끌미끌했다. 전도사님은 나에게 범인을 잡아오라는 특명을 내렸다. 20명 남짓한 중고등부 아이들은 모두 지하실 열쇠의 위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들 조금씩은 의심스러웠다. 그 중 몇 명은 새벽에 몰래 교회에 들어와 멋대로 놀기도 했다.(나도 친구들을 몇 번 데려와 논 적이 있었다.)      


내가 용의자로 지목한 녀석은 중학교 3학년 아무개였다. 아무개는 동네에서 소문난 양아치였고, 아버지가 정육점을 하셨고, 전 날의 알리바이가 불분명했다. 지난번에도 평일 새벽 교회에서 술을 먹다 걸린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열심히 신문했지만 그 녀석은 끝까지 부인했다.


“새꺄 부끄러운 줄 알어.”


심증만으로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자백 받아내기를 실패하며 나는 그 녀석에게 거친 말을 쏟아냈다.

그 당시의 나는 내 확신을 증명하지 못했다는 답답함에 잔뜩 억울했다. 증거가 없어 백 퍼센트의 범인을 놓아줄 수밖에 없다니. 애석했다.     


5년이 지난 어느 날, (교회 따위는 진작 때려 치운지 오래였던) 나는 죽마고우들과 오랜만에 뭉쳐서 술 한 잔을 했다. 고등학교의 재미난 추억들을 하나씩 풀어놓는 분위기였다. 다들 공감하며 떠들고 있던 찰나, 누군가 충격적인 말을 했다.     


“야. 그때 기억나냐, 서댐이네 교회에서 우리끼리 고기 구워먹은 거.”

“무슨 소리야?”

“네가 저번에 우리 한번 데리고 갔었잖아. 새벽에 같이 과자 먹으면서 놀았던 날 너도 기억하지? 그때 열쇠 놔두는 곳 봤었어.”

“고기사건. 그거 너희였어?”

“공원에서 몰래 구워먹으려고 했는데 그날 날씨가 좀 추웠냐. 어쩔 수 없이 너네 교회에서 맛있게 구워먹었지. 미안했다! ㅋㅋㅋㅋㅋㅋ”     


범인은 아무개가 아니라 내 친구들이었다. “새꺄 부끄러운 줄 알어.” 아무개는 내 욕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도 나는 정육점 집 아무개의 얼굴을 떠올리면 극심하게 부끄럽고 미안해진다. 나의 추론은 지극히 논리적이었으나, 진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우리는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인 판단이 진실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지만, 때로 어떤 진실은 드러난 논리에 완전히 위배될 수 있다. 우리가 가진 논리라는 것은 딱 드러난 만큼의 사실일 뿐이므로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다는 것.     


영화 속에서 진실을 찾아가는 길은 꽤 복잡해서 누구든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 과정들은 진실이 논리와 합리라는 폭력 속에서 얼마나 깊이 숨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당한 그대로의 방식으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영화의 후반부는 통쾌하다기보다 씁쓸하다.     

영화: '죄 많은 소녀'

2. 예언의 딜레마     


“내일 집 밖으로 나간다면 당신은 죽을 것이오.”

훌륭한 예언자가 이런 예언을 했다고 생각해보자. 그 예언자가 얼치기 무당이 아니라, 실제로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자라면 우리는 이 예언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을까.     


내가 집 밖으로 나가게 되면 100%의 확률로 죽을 것이므로,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예언이 사실이라는 것은 죽기 직전에 알겠지만 그때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만약 하루 종일 집 안에만 있었다면, 예언이 나를 살렸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예언을 따라서 살았다고 해도 예언자에게 고마움을 표하기는 어렵다. 진짜 집밖으로 나갔다면 죽었을 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언 앞에서 무력하다. 누군가 '나 내일 죽을 거야.’라고 말할 때, 그것이 진심인지 협박인지에 대해서는 미리 알 수 없다. 아무래도 죽지 말라고 어떻게든 뜯어말리는 쪽이 좋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요구를 다 들어줄 것인가. 죽음을 말하는 사람 앞에서 우리는 평생 휘둘릴 수밖에 없는가.      


죽겠다는 사람의 미래를 알 수 없기에 협박과 예고는 늘 동시에 실존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죽었으면서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이런 불확실성은 오판을 부른다. 정말 죽으려는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는 실수가 여기에서 온다.          

영화: '죄 많은 소녀'

3. 사막의 살인사건: 범인은 누구인가?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세 명의 남자가 있다.     


A, B, C 세 사람은 하루 종일 행군을 하고 밤이 되자 사막에서 텐트를 쳤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잘 들어보시라. A는 C를 오랫동안 미워했고 그를 죽이기로 한다. C의 물통 속에 독약을 풀어 그가 죽기를 기다린다. (C는 그 물통 이외에 달리 물을 마실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그런데, B 또한 A와는 상관없이 C를 살해하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B는 (C의 물통 속에 이미 독약이 풀어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C의 물통에 조그만 구멍을 뚫어 물이 서서히 새도록 하였다. 결국 며칠 후 C는 목이 말라 죽고 말았다.      


이 경우 C를 살해한 장본인은 누구인가, A인가, B인가? A가 C의 물통 속에 독을 넣지 않았더라도 죽었을 게 분명하기 때문에 범인은 B가 될까? A가 그 물통 속에 독을 탄 이상, C는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며 그러므로 설령 B가 물통에 구멍을 뚫지 않았더라도 C는 죽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범인은 A일까?     

자. 범인은 누구인가?

-

영화 속에서 경민은 죽는다. 경민의 사인은 자살인가? 아니라면 그녀를 죽게 만든 사람은 누구인가?   

  

영화: '죄 많은 소녀'

4. 유다 이야기     


성서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구일까. 예수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다. 귀한 아들을 제물로 바치게 된 아브라함일까. 형제에게 배신당한 요셉일까. 아니다. 성경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유다다.     


예수는 자신이 죽음이 세상의 죄를 씻어내고 구원을 이루는 데 필요하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는 처절한 원망을 내뱉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계획임을 알고 곧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누군가 예수를 배신하는 것 또한 야훼의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 배신자로 당첨된 사람에게는 무슨 죄가 있는가. 유다는 하나님에게서 완벽히 버림받은 단 한 명의 희생자다. 유다는 태어날 때부터 지옥에 가기로 정해진 자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런 유다의 사정따위는 없다. 그저 예수를 푼돈에 팔아먹은 희대의 나쁜 놈일 뿐.

유다는 죄책감에 자살하고,(아마 지옥에 갔을테고) 인류의 영원한 적이 된다.


유다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에게 완벽한 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완벽한 가해자 앞에서 한계 없이 잔인해진다. 우리는 늘 알맞은 죄값을 말하지만, 타인의 완벽한 죄 앞에서 죄값은 적정선 따위 없다.


반박할 수 없는 죄인은 그저 때리는 대로 맞아야한다. 죄값이라는 이름하에 값없는 비난을 오롯이 견뎌야한다. 표면적으로는 정당한 복수이나 이면에는 화풀이가 있다. 오냐. 이번엔 너로구나. 잘못한 사람은 마음껏 패도 된다는 세상의 논리. 그 자체로도 무섭지만, 완벽한 가해자라고 밝혀졌던 사람이 사실은 가해자가 아니었음을 알게 될 때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유다를 만들고, 그를 돌로 치고, 새로운 유다를 찾아내고 돌로 치고, 죄는 옮겨가고, 또 옮겨 간다. 다음 차례의 유다는 멀쩡한 사람을 유다로 만들었다는 죄까지 더해진다. (영화의 제목이 죄 지은 소녀가 아니라 죄 많은 소녀인 이유는, 그녀가 죄인이라는 이유로 모든 죄를 더해가며 짊어지게되기 때문이다.)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리는 수많은 유다들, 혐오사회의 단면이다. 혐오가 혐오를 만들고, 혐오하는 것을 혐오하고, 혐오하지 않는 것을 혐오하고…  세상은 미쳐 돌아가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죄인에게 분노하는 이유는 그의 죄 때문인가. 아니면 그에게만큼은 분노를 마음껏 표출해도 용인되기 때문인가.     


*     


영화 속의 모든 인물들은, 죄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각각으로 보여준다.


죄를 밝히려는 자. 숨기려는 자. 떠넘기려는 자. 외면하는 자. 왜곡하는 자. 무시하는 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해결하는 자. 해결을 막는 자. 처절하게 단죄하는 자 등...     


그래서 영화를 끝까지 보는 것은 그 자체로 너무나 힘이 든다. 영화 속 어느 곳에는 꼭 내가 있다. 죄 앞에서 우리는 모두 부끄럽다.


영화: '죄 많은 소녀'


매거진의 이전글 바람직한 속죄의 방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