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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Aug 20. 2018

바람직한 속죄의 방법

- 영화, [킬링디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영화 중 가장 충격적인 오프닝 씬을 꼽으라면 킬링디어의 첫 장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수술실, 열린 가슴에서 그야말로 펄떡펄떡 뛰는 심장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주인공은 심장의학과 의사다.     


외과의사인 주인공은 의문의 소년과 자주 함께 하는데, 이 소년에게 밥을 사주고, 선물을 하기도 한다. 종종 용돈도 주는 것 같다. 소년은 불쑥 병원에 찾아와 주인공 스티븐 머피를 깜짝 놀라게 하고, 머피는 제 발 저린 표정으로 동료의사에게 딸의 친구라며 열심히 둘러댄다.

소년을 집에 초대하기도 하고, 소년의 집에 방문하기도 한다. 그리고 영화 중반부를 넘어설 때, 이 미스터리한 관계의 전모가 밝혀지게 된다.     

영화: 킬링디어(2017)

나중에야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소년 ‘마틴’은 주인공이 의료사고로 죽인 한 남자의 아들이다. 실수라고 보기도 어려운 것은, 그가 수술 집도 직전 음주를 했기 때문이다. 명백히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볼 수 있다. 마틴은 이 사실을 알고, 머피를 압박하다가 끝내 가족 중 한명을 직접 살해하라는 협박을 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영화가 주는 메시지에 대해 고민해보게 된다. 누군가에게 큰 죄를 저질렀다면, 속죄의 대가는 무엇이어야 할까.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을 죽였다면, 나의 소중한 사람도 내주어야 하는가. 복수와 속죄에 대한 판단은 어렵다.     


구약성경의 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설명된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조금 야박하게 보이지만, 당시의 감정상 가장 합리적인 대책이었다. 이는 꼭 똑같이 되갚아주라는 말이 아니고, 받은 상해 이상의 보복은 안 된다는 마지노선에 가까웠다.      


마틴의 복수론은 이와 맞닿아 있다.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의사에게 같은 고통을 요구하는 것이다. 후반부 머피의 팔을 물어뜯은 직후 자신의 팔을 똑같이 물어뜯는 행동은 이를 정확히 보여준다. 이것이 정의에 가깝다는 그의 말은 섬짓한 구석이 있다.      

영화: 킬링디어(2017)

마틴이 아버지의 사망 이후 어머니와 가까워지고, 아버지와 스파게티 먹는 법이 닮았다는 것을 보면 그가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머피를 자꾸 집에 초대하는 이유도 그것으로 설명된다. 나의 아버지가 되어주든지. 너의 가정을 파괴하든지. 결정하라는 것이다.     


아버지를 계승한 아들은 책임도 이어져 있다. 아버지를 계승한 마틴은 아버지의 목숨 값을 머피에게 요구하고, 영화 후반부 심장의학과 의사가 되겠다는 밥은 아버지를 계승함으로써 죽는다.      

영화: 킬링디어(2017)

우리는 어떻게 속죄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복수해야 하는가. 이야기의 결정은 다소 비극적이고 잔인하다. 한편 영화 ‘밀양’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이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씬은 다음과 같다. 전도연은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기로 하고 교도소에 찾아간다. 하나님을 만났고, 비로소 당신을 용서하기로 했다고. 그런데 살인범의 대답이 가관이다. 저는 교도소에서 하나님을 영접하고 이미 용서를 받았습니다.     


밀양에서의 살인범과 킬링디어의 머피는 같은 잘못을 하고 있다. 당사자에게 용서를 빌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둘은 모두 자신 나름대로의 합리화와 결론을 내고, 자신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속죄를 한다. 우리는 올바른 복수의 방법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올바른 속죄의 방법에 대해서는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을 정당화하거나 합리화 하지 않고 진심의 사과를 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영화: 킬링디어(2017)

영화의 원 제목은 ‘The Killing of a Sacred Deer’ 라고 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의 아끼는 순록을 사냥하고, 이에 분노한 여신이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했다는 이야기. 이 신화 속에서 딸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죽기로 한다. 그런데 죽기 직전 이피게네이아는 사라지고 순록 한 마리가 나타났다. 이 때문에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은 이피게네이아가 죽지 않고 신들과 함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머피가 망설이지 않고 자신 혹은 가족의 희생을 납득하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주었다면, 그렇게 마틴의 상처받은 마음을 헤아려 주었다면. 아들이 죽는 극단적인 결말까지는 치닫지 아니하였으리라.     


마틴의 가죽 시곗줄은 구약(복수)을 상징하고, 머피의 메탈 시곗줄은 신약(용서)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마틴이 가죽 시곗줄로 바꾸기 전에 그가 먼저 행동했어야 했다. 마틴이 시곗줄은 바꾼 것은, 세련되고 비싼 방법보다 사과만은 아날로그의 방식을 택해야한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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