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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Aug 10. 2018

그녀는 왜 걷는가, WILD(2014)

- 치유에 이르는 길

한 여자가 가파른 비탈로 부츠를 떨어뜨린다. 부츠는 급경사를 타고 통통 튀며 구른다. 여자는 망연한 표정으로 떨어지는 신발을 바라보고, 아쉬움은 억울함으로, 다시 분노로 변한다. 그녀는 괴성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면서 나머지 한 짝의 부츠도 던져버린다. 영화는 그렇게 시작한다.    

 

그리고 드는 생각. 그녀는 왜 걷는가.      


우리는 언제 집을 떠날까.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영웅은 모두 집을 떠난다. 모험은 집을 떠남으로써 시작된다. 그들은 모두 집을 떠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지난날의 자신을 잊고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이러한 영웅 신화는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일러준다. 우리가 어머니의 뱃속을 떠나 좁고 긴 산도를 통과해 나오면서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듯, 모두 한 번 쯤은 집을 떠나 불편함과 위험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와일드WILD(2014)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늘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해야 할 일을 제때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영어 공부나, 유럽 여행, 악기 배우기, 책 읽기 등 엉성한 계획으로 머릿속을 채우지만 이는 늘 이런저런 이유로 보류된다.


우리는 무엇이든 해야 할때가 아니라 할 수밖에 없을 때 비로소 시작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스무 살 무렵부터 늘 꾸준히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처참하게 실패했다. 늘 작심삼일이었고, 그나마도 내보이기 민망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런데 재작년 꽤 오래만난 여자친구와 헤어진 다음에는 강박적으로 글을 쓰게 되었다. 쓰고 싶어서 쓴다기보다 당시의 나는 글을 쓸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다. 써야만 했기 때문에 꾸준했다.


막연한 계획은 우리를 움직이지 않는다. 절박한 계기가, 강렬한 열망이 우리를 움직인다.   

  

영화: 와일드WILD(2014)

셰릴은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여행을 시작한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머니가 갑작스러운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녀는 허무와 우울에 잠식된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긍정적이고 선한 자세로 살아냈던 어머니와 자신에게 왜 그런 불행이 닥쳐야했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 평생 자신으로 살아보지 못했다는 어머니의 말은 셰릴의 가슴에 유리조각처럼 박혔다. 마약과 섹스로 인생을 낭비하면서 셰릴은 ‘엄만 즐기지도 못했지. 나는 다 할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리고나서 드는 죄책감은 엄마가 갈망하던 아름다운 삶의 존엄을 자신이 한없이 추락시켰다는 데서 왔을 테다.     


‘달팽이가 되느니 참새가 되겠어. 못이 되느니 망치가 되겠어.’ 영화의 중간 중간 나오는 이 노랫말은 유한한 인생을 더이상 수동적으로 살지 않겠다는 그녀의 의지일 것이다.

영화: 와일드WILD(2014)

여행의 한 가운데, 셰릴은 다음과 같은 어머니의 말을 다시 떠올린다.

‘일출과 일몰은 매일 있어서 네가 맘만 먹으면 볼 수 있어. 너도 언제나 아름다움의 길에 들어설 수 있어.’

험난한 여행의 순간순간, 아픈 기억과 마주하면서 그녀는 차츰 자신을 치유한다. 아름다운 길에 들어설 수 있는 기회는 언제나 있고, 그건 전적으로 선택의 몫이라는 의미를 그녀는 완전히 받아들인다. 가진 게 없어도 사랑이 넘치면 행복하다는 어머니의 말을 되새긴다.     


영화를 통해 우리는 모두 셰릴이 된다.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고, 그녀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그녀를 지켜보게 된다. 타인을 용서하고, 자신을 용서하는 일. 용기있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일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불평하고 안주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게 된다.      

영화: 와일드WILD(2014)

마지막 그녀가 신의 다리에 도착했을 때. 나도 동행한 듯 가슴이 벅차올랐다. 엄마는 여우의 모습으로, 그녀의 여정을 응원하다가 마지막에 다시 한 번 등장한다. 말없이 돌아서는 모습일 뿐이지만 우리는 그 몸짓에서 따뜻한 격려와 칭찬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고생했다고. 잘했다고. 네가 참 자랑스럽다고. 엄마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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