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댐 Aug 01. 2018

‘가짜 가족’은 어떻게 진짜가 되었나

- 고레에다 히로카즈, ‘어느 가족’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느’라는 말을 좋아한다. 나는 사랑이 거기에서 온다고 믿는다. 어느 날, 어느 순간, 어느 누군가를 만날 때 사랑은 부르지 않아도 밀려오는 파도처럼 다가온다. ‘어느 가족’은 따뜻한 단어 두 개가 잘 만난 제목이다. 어감도 좋다. 어느 어느 어느… 걸리거나 각진 소리 없이 부드럽게 이어진다. 원제 ‘만비키 가족’보다 나은 것 같다.

     

영화는 아버지와 아들로 보이는 두 남자의 도둑질로 시작한다. 신호를 주고받고, 절묘하게 서로를 가려주면서 생필품을 훔친 부자는 고로케를 가족 수에 맞게 사가지고 귀가한다. 그러다가 집에 도착할 즈음 밖에 혼자 남겨진 여자아이를 발견한다. 겨울이 가까워진 쌀쌀한 날씨. 잠깐 몸만 녹일 겸 집으로 데려온 것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아예 같이 살게 된다.      

영화: 어느 가족

영화가 진행되면서 밝혀지는 가족관계는 실로 기묘하다. 부부가 원래 남이었던 것은 이상할 게 없지만 할머니와 아내도 남. 할머니와 처제도 남이다. 아내와 처제도 남이고, 아빠와 아들도 남이었다. 데려온 여자아이도 남이다. 할머니와 남편, 아내, 처제, 아들, 막내 딸이 모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이들은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럽게 모여 산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으로 이어져 있는가. 영화 중반부에 아키는 오사무에게 묻는다. ‘언니랑은 도대체 언제 해?’ 오사무는 웃으며 대답한다. ‘우리는 그런 걸로 이어져있지 않아. 마음으로 이어져 있지.’ 우리는 살아가면서 ‘피’라는 것의 무서움을 실감한다. 어느새 부모와 닮아있는 자신을 보면서 깜짝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이지는 않다. 뉴스를 통해서 쏟아지는 패륜과 학대의 소식들은 ‘피’의 무게를 한없이 가볍게 추락시킨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가짜 가족들이 있는가. 돈으로 연결되거나 피로만 연결된 사람들. 감정 없이 섹스하는 부부들. 이들이야말로 가짜 가족이 아닌가. 가족이라는 의미는 결국 마음이라는 단어로 귀결된다.     

영화: 어느 가족

살아가면서 ‘무엇’이라는 단어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무엇을 하는가, 무엇으로 부르는가는 중요하지 않고. 누구와 하는가, 어떻게 하는가, 누가 어떻게 부르는가가 더 중요하다. 좋아하는 일본소설의 일부를 인용하고 싶다.

 ‘살면서 중요한 것은 이력서에 기록되지 않아. 언제 학교에 입학해서 졸업했는지, 몇 년 동안 직장에서 근무 했는지와 같은 굵직한 사건들은 남지만 하루하루 반복된 시시한 일상은 모두 생략되어 버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생략되어 버린 무수한 일상이야. 시시하게 반복되는 일상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언제 무엇을 했는가는 객관적인 사실일 뿐이지만 어떻게, 왜 했는가는 주관적 해석의 영역이 된다. 그래서 이들은 호칭에 연연하지 않고, 서로를 평가하지 않는다. 그저 버팀목과 그늘이 되어줄 뿐이다. 아키의 표정과 말투, 발바닥의 온도만 가지고도 속내를 정확하게 알아맞히는 할머니는 피보다 진한 마음의 힘을 일러준다.     

영화: 어느 가족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후반부 경찰의 조사 장면이었다. 영화를 보면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예쁘던 가족의 모습이 경찰의 입에서 복기되자 온통 비상식적이고 불법적인 일이 되어버린다. 이 사랑스러운 가족의 부족하지만 단란한 삶은 시체유기, 유괴, 살인, 절도, 아동학대, 금품 갈취와 같은 단어들로 변명할 수 없이 정리된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는데 모조리 틀린 것만 같이 보여서 괜히 답답하고 서러워진다. 모두가 제 자리로 돌아가는데 행복과 가장 멀어진다. 합법과 불법.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가 온통 혼란스럽다.     

영화: 어느 가족

영화는 가족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를 선택할 수 없지만 어느 곳에는 서로를 선택한 가족도 있다. 피보다 진한 물이 있음을 보여준다. 피보다 물이 진하다는 말이 아니라, 물도 이렇게 진할진대 하물며 피가 섞인 가족이 이보다 못해서야 되겠냐는 호소에 가깝다. 이력서에서 생략된 시시한 일상에는 산소처럼 당연한 가족의 존재가 있다. 당연하고도 중요한 이 사실과 더불어 우리는 ‘스위미’를 오래 기억해야한다.     


‘스위미’는 영화 속에서 쇼타가 아빠에게 들려주는 동화다. 작은 물고기들이 힘을 합쳐 거대한 참치를 물리친다는 이야기. ‘어느 가족’은 스위미를 길게 늘인 이야기라고 해도 무방하다. 영화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가족이라고 우기면서 우리에게 묻는 것이다. 험한 세상, 고립되고 소외된 사람들이 힘을 합쳐 살아간다면. 그것이 가족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고.     


영화: 어느 가족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모두 평론가가 되어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