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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ul 19. 2018

우리는 모두 평론가가 되어야 한다.

- 어설프더라도 꿋꿋하게

대학교 때 동기 한 명은 중학교 때 글쓰기 과외를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국문과인지 문창과인지를 다니는 여대생에게 배웠다던데. 그 친구는 글쓰기를 배웠다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그 친구의 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겉멋과 허세가 가득한 글이었기 때문에, 읽다보면 내가 괜히 민망해지곤 했다.


‘그래서 넌 뭘 배웠니.’ 그런 질문을 나는 했고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일기 쓸 때 ‘오늘은.’ 이라고 시작하면 안된대. 그것만으로도 엄청 늘더라.’

그게 뭐야. 하고 비웃었는데 아직도 잘 잊히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꽤 괜찮은 어드바이스였다. 우리는 늘 그런 식의 일기를 쓰지 않나. ‘오늘은 영수네 집에 가서 놀았다. 참 재미있었다.’ 라든지 ‘오늘은 비가 와서 엄마가 부침개를 해주셨다.’ 라든지 ‘오늘은 형이랑 싸워서 아빠한테 혼이 났다. 형이 잘못했는데 똑같이 혼나서 억울했다.’ 라든지 항상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쓰기 바빴던 것이다.      


일기를 ‘오늘은’ 없이 쓰게 되면 도입부는 엄청나게 확장될 수 있다. 글의 시작은 감정이 될 수도 있고 깨달음이 될 수도 있다. 사건을 나열하더라도 오늘이라는 시간보다 행위가 먼저 눈을 사로잡을 것이다.     

 

‘오늘은’을 빼고 일기를 쓰면 그때부터 글은 일기보다 산문에 가까워질 것이다. 산문에 가까운 글을 쓰려면 조금 더 생각해야 할 것이고, 자신의 내면에 다가가게 될 것이다. 마음속에 있는 개념들이 글이라는 형태로 종이에 뿌려질 때 더해지고 정리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 경험들은 앞으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때 내 친구의 글쓰기 선생님이 그 친구에게 알려주려고 했던 것은 그런 과정들이 아니었을까.     


나는 영화를 많이 보는 만큼 리뷰영상도 많이 보고, ‘왓챠’라는 어플로 평점이나 코멘트도 잘 남겨놓는다. 코멘트를 남긴 후에는 다른 사람들 것도 찾아보게 되는데, 영화 어플의 평점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코멘트의 성격이 나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 번째는 그냥 재밌다. 재미없다 정도의 감상과 함께 별점을 매기는 유형이다. 이 사람들은 영화가 러닝타임 동안 자신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두 번째는 자칭 평론가, 타칭 평론가 병에 걸린 사람들인데 이들은 각자의 논리와 잣대로 영화를 평가한다. 칭찬을 할 때도 그냥 ‘좋은 영화다.’ 하는 법이 없다. ‘코엔 형제가 영화사에 또 다른 발자취를 남기다.’ 라든가, ‘의미심장한 메시지와 블랙코미디적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본다. 적절한 구성과 배우들의 호연이 돋보인다.’ 라는 식으로 그럴듯한 감상을 내놓는다.

세 번째는 코멘트+시인 형이다. 이들은 ‘고요와 역동.’ ‘빛나고, 어둡다.’ ‘사라지는 것은 모두 아름답다.’ ‘삶은 삶이어서 삶이다.’ 같은 애매하면서도 시적인 표현들로 영화를 평한다.     


짧은 글로 사람의 철학을 가늠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피카소와 내가 그림대결을 한다면 내가 이길리 만무하지만 도화지에 찍은 점 하나는 나같은 문외한이 찍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까. 짧은 영화평은 허세와 압축 사이에 걸쳐있어서 때론 유치하게도 날카롭게도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어설프게 평론가 흉내를 내는 이들을 보면서, 평론가 병에 걸려서 좋은 영화를 폄하하지 말라고 말하기도 한다. 좋은 영화를 깎아내리면서 자신의 예술적 조예를 드러내려는 모습이 좋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칭 평론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나름의 잣대로 영화를 해석하고, 평가하다보면 일기와 산문의 차이만큼 영화와 삶을 바라보는 깊이가 달라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재밌다. 재미없다. 좋다. 나쁘다. 같은 말들은 일기 쓸 때의 ‘오늘은’과 같아서 모든 현상을 단편적으로만 판단하게 만들 수 있다. 무엇이 재미있고, 어떤 부분에서 재미가 없었는지. 좋은 부분은 어땠고, 나쁜 부분은 어째서 그런지. 이런 것들을 고민하면서 영화를 보면 책을 읽는 것처럼 작품과 대화하는 기분도 든다. 무언가 찾아내려고 하면 찾아지기도 하고, 그런 경험을 할 때는 꽤 짜릿하다.     


또 그럴 듯한 말로 대충 포장하는 듯 보이는 코멘트 한 줄 시도 영화를 한 문장으로 압축해서 전달하려는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에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이린이 예쁘네요.’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아이린의 아름다움을 15자 이내의 길이에서 비유적으로 표현해보세요. 하면 우리는 조금 더 고민하게 될 것이다.     


일기에서 ‘오늘은’을 빼는 일. 영화에서 자칭 평론가가 되는 일은 결국 성의 있게 현상을 바라보는 일이 아닐까. 성의 있게 바라보고 성의 있게 생각하면 우리가 감지하지 못한 세상이 열리기도 한다. 그게 어설픈 흉내내기나, 낯 간지러운 표현들이 난무하는 글로 되더라도 그편을 택해야 한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는 시 구절처럼. 무엇이든지 오래 보는 것이 낫다. 그러니까 우리는 조금 어설프더라도 모두 평론가가 되어야 한다. 내 생각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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