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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ul 15. 2018

'테이크쉘터'

- 그 역병 같은 불안에 대해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얼마 전엔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은 각자 다른 온도와 염도로 하루를 살아내고 있어서,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너무 짜고 더운 날에 타인은 너무 춥고 싱거워서 각자 같은 것을 먹고 같은 것을 보아도 다르게 느낄 수밖에 없다. 타인을 이해하려면 내가 너무 춥고 싱거운 어느 날에 이르러서야 가능하게 된다. 나는 그 바다의 벽이 허물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너의 바다와 나의 바다가 정확히 같은 온도와 염도로 섞일 수 있다면. 세상의 많은 오해와 감정의 낙차는 사라지지 않을까.     

  

주인공 ‘커티스’는 불안와 우울 속에 갇혔다. 아마 오랜 시간 조금씩 쌓인 불안 요소들이 기폭제가 되었을 것이다. 딸은 후천적으로 청력을 상실했다. 영화 속에서 이유가 나오지는 않지만 나는 어느 정도 아버지의 실수나 잘못이 있었을 거라고 예상한다. 청력을 잃어버린 딸과, 대출이 끼어있는 집과 차. 그럼에도 너무 헌신적인 아내에 대한 미안함은 흐린 날씨와 함께 커티스의 정신을 강타한다. 정신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의 존재 또한 그에게 늘 정서적인 혼란을 주었을 것이다.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커티스는 누군가의 기댈 어깨가 되어주어야 하는 존재이지 남에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심리적, 육체적 안정을 찾을 수 있는 방공호(이하 쉘터)에 집착한다. 영화 속에서 쉘터는 집 앞에 커티스가 만든 물리적인 공간임과 동시에 커티스의 마음을 은유한다. 우울과 불안에 갇힌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닫고, 타인과의 교감에 실패하면서 그 증상을 가속화하게 된다.    

 

불안은 자신의 몫이다.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바다가 있고, 그 바다가 보이지 않는 벽으로 막혀있는 것이라면 드물게 쏟아지는 불안이라는 독약은 나의 바다에만 용해될 것이다.


나의 바다에는 불안과 우울이 독약처럼 퍼져있고, 호흡기를 통해 계속 들어오는데 그걸 바깥에 있는 타인이 이해하기란 어렵다. 공포를 직시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오롯이 혼자서 이겨내야 한다는 점에서 사람이 우울과 불안을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언뜻 성경 속 노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뜬금없는 어느 날, 신의 음성을 듣게 된다. 비를 내려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고, 신은 노아에게 배를 만들어 가족들과 함께 모든 동물들을 태우고 피신하라고 명한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 시간은 자그마치 120년이었다. 모두가 노아와 그의 가족을 비웃었지만 산을 옮긴 ‘우공’처럼 결국 방주를 완성해냈다. 그 뒤에 산을 덮을 만한 대홍수와 비로 세상은 한번 멸망한다.  노아의 가족만 살아남는다.


계시와 함께 종말을 예감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노아의 방주와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마지막 폭풍을 부인과 아이가 느끼는 것을 통해, 우리는 그 불안과 우울이 타인을 통해 극복되기는 어렵지만 쉽게 전염될 수는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역병처럼. 고치기는 어렵고, 전염되기는 쉬운 성질의 것. 아내는 남편이 직장을 잃으면서 대출금을 갚기 막막한 상황에 다다르고, 딸이 자신의 청력을 되찾는 것이 조금 어려워졌다는 것을 막연히 깨달아갈 때 커티스의 불안은 가족에게까지 확장된다. 영화의 결말그래서 더 슬프다.

영화의 결말을 안타깝게 확인하며, 나는 어쩌면 노아도 같은 증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타락해가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기댈 곳 없이 불안해할 때 망상처럼 계시를 받은 그의 모습. 햇빛 쨍쨍한 날에 방주를 만드는 노아의 굽은 등. 그리고 대홍수 같은 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를 돕는 가족들의 장면을 떠올려보면 조금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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