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댐 May 31. 2018

당신이 평범하다구요?

- 소수자에 대하여, 영화 '써클'

영화: 써클(2015)

여기 50명의 사람이 있다. 발밑의 작은 원은 그들 각자의 구역이다. 이 구역을 벗어나면 감전 비슷한 충격을 받고 사망한다. 타인을 만져도 똑같은 충격이 가해진다. 2분에 한 번씩 사람이 죽어나간다. 발밑에는 화살표가 있는데, 각자 자신의 화살표만 눈에 보인다. 이들은 이 화살표를 다른 사람을 향하도록 움직일 수 있다. 일종의 투표인데,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사람은 죽는다. 2분에 한 번씩,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이 살인투표는 계속 된다.     


*     


누군가 그랬다. 평범하게 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라고.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세상은 거대한 상대평가 시험과 같아서 평균이라는 범주에 모든 사람이 들어갈 수는 없다. 나는 신장 176cm의 남자이고, 이성애자이며 4년제 대학을 졸업했고, 병장만기제대를 했다. 이런 몇 가지 기준으로 본다면 나는 얼핏 평균의 범주에 들 수 있는 사람 같다.

정말 그럴까?     

영화: 써클(2015)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의 평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가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고발했다고 말한다. 인간의 추악함이 안 드러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사실 생존본능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 어쩌면 합리적인 것이다. 50명 중 누군가 한명을 투표로 죽여야 한다면 그게 자신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은 당연하다. 누가 이를 추악하다고 할 것인가. 모든 사람들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완전한 남이다. 그럼에도 각자 나서서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것이 인간적이며 아름다운 행위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이 영화는 사실 평균이라는 폭력과 소수자에 대한 집단의 차별을 고발하고 있다. 처음 50명이 정신을 차려서 스테이지 위에서 서로를 마주보았을 때, 이들은 구역을 마음대로 벗어난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행동제한의 룰을 배웠다. 이후 몇 명의 죽음을 통해 바닥의 화살표를 통한 투표방식으로 죽을 사람이 정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투표로 죽을 사람이 정해지는 것이다.     

영화: 써클(2015)

그리고 한 남자가 입을 뗀다. 70-80대의 노인들을 우선해서 죽이자고. 그들은 어차피 곧 죽을 사람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의한다. 노인이 여럿 죽어나가자 그들은 암에 걸린 사람을 죽이기로 하고,(심지어 그녀는 완치환자였다.) 그 다음에는 불법체류자일지도 모르는 멕시코인을 죽이자고 말한다. 범죄자도 투표의 희생자가 된다. 다음에는 흑인과 백인이 편을 갈라 싸운다. 의견이 미처 모이기 전에 투표가 진행되기도 하는데 그때는 이슬람 여성이 죽는다. 포르노 배우를 죽이자고 지명하는가 하면, 레즈비언을 사회악으로 규정하며 몰아세우기도 한다. 서로의 직업을 묻거나, 소득을 묻기도 한다. 어떤 차례에서는 유신론자들로 뭉친 사람들이 무신론자를 죽인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기준으로 집단을 형성해서 소수자들을 희생자로 만든다. 그리고 사람들이 한명씩 죽어나갈 때마다 느낄 수 있게 된다. 진정 평범한 사람은 세상에 없다는 것.

영화: 써클(2015)

우리는 모두 어떤 면에서는 평범하고 어떤 면에서는 특별하다. 이 특별함은 우월과 열등에 모두 적용되는 말이다. 평균 이상 혹은 이하의 무엇인가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뜻이다. 우리는 모두 몇 가지의 치명적인 고질병을 달고 살아간다. 어떤 경험에서는 완전히 배제되어있고, 완전히 유별난 취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초등학교 때 반에 꼭 한 명쯤은 우유에 밥을 말아먹는 친구가 있었다. 그들은 입맛이 조금 유별나다는 이유로 엄청난 혐오를 받아내야 했다. 그 알량한 음식 취향 하나로도 소수자는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또, 부모 중 한 명이 없다는 이유로 죄 없는 어린 아이들은 뒷담화나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모두 소수자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다수결을 신봉하는가. 아이러니한 일이다. 소수자를 나누기 힘든 경우에는 오히려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지만, 성정체성이나, 지적장애인 처우문제같이 소수자가 압도적으로 적은 경우에는 공리주의적 입장을 낸다. 어쩌면 인간의 추악함은 생존본능보다 그런 비겁함에 있는 것 같다.     


영화: 써클(2015)


자신이 유리할 때에는 언제든 다수의 이익을 내세우지만, 자신이 소수자일 때에는 부당함을 증명하는 일.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의 행동이 우리 모두의 민낯이다. 영화를 보면서 사실 많이 부끄러웠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가 아주 높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분명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 영화가 끝날 무렵까지 나는 내가 평균보다 조금 덜 비겁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다수에 매몰되는 비겁함을 버리고 소수자의  편에 설 수 있는 담대함이 내게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Lost Stars와 City of Star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