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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Aug 20. 2019

우리 형의 대책 없는 소비습관에 대하여

형 이야기 (1)

사람의 성격은 타고난 성향에 따라 결정될까? 아니면 환경의 영향을 받아 형성될까? 나는 오래전부터 환경이 천성보다 중요하다고 믿는 쪽이었지만, 최근에는 천성의 영향이 더 크다고 본다. 환경의 영향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같은 환경에서 자란 형제 자매간의 성격이 천차만별인 것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접근하려는 것은 아니고, 사실 나와 우리 형의 성격을 떠올리면서 주관적으로 생각해보았다.     


나는 좋게 말하면 사려 깊고 나쁘게 말하면 조금 소심하다. 돈에 관해서도 그러한데, 비싼 물건을 덥석 산 경우가 거의 없다시피하다. 사는 경우에도 정말 오래 고민해서 장만하는 식이다. 그에 비하면 나의 친형은 어릴 때부터 필요하면 넙죽사버리는 비범한 소비습관을 나타냈는데, 한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어릴 때는 동네마다 놀이기구처럼 돈을 내고 타는 사설 트램펄린이 하나씩 있었다. 방방, 퐁퐁, 봉봉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는데 우리 동네(청량리)에서는 그냥 덤블링이라고 불렀다. 오백원을 내면 30분 동안 탈 수 있었다. 우리 집에서 학교에 가려면 완만한 경사의 주택가를 지나가야 했는데 언덕배기에 문방구가 있었다. 우리 동네 트램펄린은 그 문방구 아저씨가 운영했다.     


당시의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형과는 두 살 차이가 나지만 내가 학교를 한 해 일찍 입학한 이유로 한학년 차이의 연년생처럼 학교를 다녔다. 그땐 너무 어려서 주기적으로 받는 용돈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그때 그때 돈을 타서 썼는데, 형과 나는 가끔씩 공돈이 생길 때마다 오백원 짜리 동전을 쥐고 언덕 위 트램펄린으로 달려가서 30분 동안 신나게 덤블링을 타곤 했다.      


그 해, 나는 초등학교를 입학했다는 것으로 친척 어른들에게 대단한 일을 해낸 것처럼 칭찬을 받았다. 전례 없이 많은 용돈을 받게 되었고 명절이 지난 직후에는 어머니에게 거의 모든 용돈을 반납하고도 만원이라는 돈이 남게 되었다. 나는 덤블링을 열 번도 넘게 탈 수 있고, 우리 집에서 팔지 않는 꽃게랑을 옆 동네 슈퍼에서 사 먹겠다는 기분으로 한참이나 설렜다.(우리 집은 구멍가게를 했었는데 꽃게랑을 팔지 않아서 옆 동네 슈퍼에서 사 먹었다. 걸리면 혼났다.)     


명절이 갓 지난 어느 평일,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형이었다. 형은 덤블링을 타면서 공중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우빈아!”

“혀엉! 재밌겠다!”

“응! 재밌어! 너도 빨리 올라와!”

“나 돈 없는데?”

“형이 다 냈으니깐 그냥 올라와!”     


타기도 전에 돈을 다 냈다는 게 무슨 소리인지 따져볼 여유는 없었다. 형은 덤블링에서 친구 몇 명과 함께 땀을 흘리며 놀고 있었고, 올라오라는 형의 말에 나도 가방을 모래바닥에 던지고 올라가서는 열심히 뛰었다. 앞으로 구르고 뒤로도 구르고 아무튼 신나게 놀았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한참이나 탔는데도 아저씨는 나오라고 하지를 않고, 형도 아무 걱정없이 계속 뛰어 노는 게 아닌가. 형과 놀던 친구들도 시간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고 뛰어 놀다가 가고 싶을 때 가방을 챙겨서 집으로 향했다. 나와 형만 남아서 1시간이 한참 넘도록 뛰고 있었다. 지친 형은 덤블링에 누워서 쉬기도 했다. 1분 1초가 아까운 덤블링에서 누워서 쉰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물었다.


“형. 근데 우리 언제 나가?”

“가고 싶을 때 가면 돼.”

“왜?”

“형이 돈 다 냈거든.”

“얼마 냈는데?”


“만 원.”     


뜨악했다. 알고 보니 형은 만 원을 내면서 해질 때까지 덤블링 두 동 중 한 동을 빌려 마음껏 타겠다고 했고, 아저씨도 그러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저씨도 참 나빴고 형도 좀 멍청했는데 아무튼 그렇게 거래는 성사되었다.     


그 날 나와 형은 해 질 때까지 누워서 쉬었다가 뛰었다가를 반복하다가 밥때가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오는 길 내내 발걸음을 딛을 때마다 바닥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났다.


덤블링을 타는데 만원을 냈다는 사실은 비밀이었기 때문에 어찌저찌 넘어갔다. 형은 그 이후로도 용돈이 생기면 뒤는 별로 생각지도 않고 거침없이 쓰곤 했다. 고등학교 때 아르바이트를 해서 15만원 짜리 덤벨을 산다거나 (별로 운동도 하지 않던 형이었다.) 20만원 짜리 기타 이펙터를 사는 등.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비싼 물건들을 덜컥 사고 한달 내내 궁핍하게 지내곤 했다.      


시간은 흘러 내가 대학에 들어갈 즘 되었을 때, 실용음악과 기타 입시에 실패했던 형은 재수에서도 낙방을 맛보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고 있었다. 대학에 가지 못한 것이 내심 아쉬워보였지만 삼수까지 할 마음은 없다고 말하면서 여름에 그냥 군대를 가겠다고 했다.      


늦은 봄, 형의 입대 날짜는 2010년 8월로 결정되었다. 입대까지는 두 달도 남지 않게 되었다.

어느 저녁이었는데 형이 컴퓨터로 뭘 열심히 찾아보고 있었다. 창을 엄청 띄워놓고 보길래 나도 자연스럽 형의 옆으로 가서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형은 옆에 앉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우빈아, 이거 예쁘지 않냐?” 했다.

“뭔데?”

형이 보고 있던 건 노트북이었다. 두 달이면 군대 갈 사람이 무슨 노트북인가 싶어서 그걸 왜 보느냐고 물었더니

“노트북이 갖고 싶어가지구.”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는 군대 갈 사람이 노트북을 사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며 한참이나 형을 설득했다. 어차피 전역하면 구식 노트북이 될 테니 돈을 잘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사라는 의도였다. 형은 내 조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월급이 나오는대로 당장 노트북을 사서 써야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형의 스타일을 잘 아니까 나도 더 이상은 뭐라고 설득할 수가 없었다.     


형은 얼마뒤 월급을 받아서 결국 노트북을 샀다. 검은색 도시바 노트북이었다. 성능도 좋았고, 멋있긴 했다. 형은 뛸 듯이 기뻐하면서 매일 같이 노트북을 가지고 놀았다.      


형의 입대는 순식간에 다가왔다. 입대를 며칠 앞두고 형은 나를 불러서는 노트북이 담긴 노트북 가방을 나에게 건넸다.


“우빈아, 이거 써.”

“어, 나 괜찮은데?”

“친구들한테 물어보니까 대학 가면 노트북 엄청 필요하다던데.”     

형은 나를 옆에 두고 노트북의 기능 같은 것들을 몇 가지 알려주었다. 언제나처럼 그렇게 덜컥 물건을 샀던 형은 백만원이 훨씬 넘는 노트북을 나에게 넘겨주고 군대로 떠났다.      


형의 바람대로 나는 그 노트북을 정말 유용하게 썼다. 그 노트북으로 글도 쓰고, 과제도 하고, 게임도 했다. 브런치에 올린 첫 번째 글도 형이 준 노트북으로 썼다. 나는 작년까지 8년도 넘게 그 노트북을 사용했다. 내가 전역했을 때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고 있던 형은 한 달 월급에 맞먹는 돈을 통째로 보내주었고, 귀국해서 방학동안 잠깐 대리운전을 할때에는 밤새 번 돈에서 몇 만원이나 떼어다가 내 지갑에 넣어 주었다. 나는 늘 형이 대책 없이 돈을 쓴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냥 씀씀이가 크고 넓은 사람이었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아끼지 않고 썼다. 돈이 아니라 사실은 마음을 베풀 때도 그러했다.      


사람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환경보다 천성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형과 나는 거의 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돈을 쓰거나 마음을 쓰는 단위가 완전히 다르다.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나쁜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형은 형으로, 동생은 동생으로 태어나는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우리 형이 태어날 때부터 형으로 태어났다고 믿는다. 백번을 다시 태어나도 우리 형은 늘 나의 형일 것만 같은 기분이다. 형 앞에서 나는 늘 동생으로 태어난 사람 같고, 그것이 한없이 자연스럽다.      


형은 이 주 전에 이십 만원을 갑자기 계좌로 보냈다. 웬 돈이냐고 했더니 생각지도 못한 공돈이 들어와서 주는 것이라고 했다. 맛있는 거 사 먹지 자꾸 왜 나를 주는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다가. 형이니까. 하면서 바로 납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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