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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Oct 09. 2019

조커가 되지 못한 조커들

어떤 기억

고등학교 2학년, 학교 축제를 앞두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과학 동아리였던 나는 유난히 일찍 끝난 동아리회의 덕분에 만화부 교실로 친구를 기다리러 갔었다.      


우리 학교의 만화부는 유난히 게으른 남자 선생님이 담당하셨는데 클럽 활동 시간만 되면 원피스나 나루토같은 애니메이션을 대충 틀어 놓고 교무실에서 주무시는 것으로 유명했다.


몇 년 간 동아리 활동이 그렇게 지속되자 소문이 파다하게 났고, 언젠가부터 학년의 양아치들은 모두 만화부로 몰리게 됐다. 문제는 그 중 드물게 정말 만화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었다는 것이었다.      


만화부 교실에 갔더니 장내는 이미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선생님은 계시지 않고, TV에는 나루토가 뛰어다니고 교실에서는 이른바 조금 논다는 친구들이 뛰어 다녔다. 뿐만 아니라 소리를 지르고, 밀치고, 무언가를 던지면서 야단을 떠는 통에 그 자체로 혼돈의 도가니 같았다. 고쿠센의 한 장면과도 비슷했다. 내가 복도에서 얼쩡거리자 친구는 그냥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들어가도 되나 싶어서 들어갔더니 이미 만화부가 아닌 친구들이 여럿 들어와서 놀고 있었다. 원래 이런 식이구나. 나도 한쪽 구석에 친구와 앉아 수다를 떨면서 놀았다.

     

“창모~창모~”

구석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아본 곳에는 가만히 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창모(가명)와, 그의 연필 잡은 손을 주먹과 발로 툭툭 치며 방해하는 혁재(가명)가 있었다. 창모는 왜소한 친구였다. 우리 학년의 대표적인 ‘찐따’캐릭터이기도 했다. 키가 작아서 만만했고,  어딘가 불길하고 음침하고 찝찝한 기운을 뿜어내서 학교 양아치들의 괴롭힘 표적이 됐다. 창모는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서 자신만의 건담을 창작해서 그리는 게 주된 일과였던 조용한 아이였는데 거친 남고생활에서는 어쩐지 첫 단추를 잘못 끼우게 됐다.      


우리 학교 양아치들은 틈만 나면 한명씩 툭툭 건드리고 다니곤 했다. 나도 몇 번 어깨로 강하게 밀침을 당한다든가, 장난처럼 팔뚝을 맞아본 적이 있었다. 나는 무척이나 불쾌하고 아팠음에도, 마치 남자들끼리의 흔한 장난인양 호탕하게 웃으면서(사실은 조금 비굴하게) 넘기곤 했다. 나는 그냥 반에서 특별히 영향력이 없는 평범한 한 명으로 잘 적응이 되었다. 하지만 창모에게는 맞설 용기도, 흘려보낼 넉살도, 어떤 행동을 취할 강단도 없었다.      


학기 초의 어느 쉬는 시간. 혁재가 그림을 그리는 창모의 공책을 찢었던 적이 있었다. 창모는  심각하게 화가 난 듯 했다. 가만히 앉은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혁재를 노려봤다. 혁재는 2초 정도는 진심으로 쫄았었는데, 창모에게 물리적으로 반항할 의지도 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곧 창모의 반응을 흉내내며 놀리기까지 했다. 이후로는 거의 전담 노리개처럼 매일 같이 놀리고 괴롭혀댔다.      


참으로 비극적이게도 만화를 좋아했던 창모는 만화를 그리기 위해 만화부를 선택했고, 만화부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양아치들의 사랑방이었다. 창모는 동아리에서마저 혁재와 같이 지내게 됐다. 창모가 괴롭힘을 당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키가 190에 육박하던 혁재는 심각하게 짓궂고 힘도 세고 거칠어서, 학년의 누구도 제지하지 못했다. 나도 걔의 타겟이 내가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느라 급급했다. 창모를 돌보거나 감쌀 여력 따위는 나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감히 없었다.      


내가 만화부에 놀러갔던 그날. 창모는 폭발했다. 손에 쥐고 있던 모나미 펜을 들고 혁재에게 달려갔다. 괴성을 지르며 모나미 펜을 혁재의 팔뚝에 찍었다. 펜팔에 살짝 박힐 정도였고, 혁재는 3초 정도 멍하니 서 있다가 소리를 꽤애애애애액- 지르면서 창모를 발로 한 번 뻥 찼다. 창모는 교실 뒤로 무협영화처럼 날아갔다. 곧이어 무자비한 폭행이 시작됐다. 더 이상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때 나머지가 우르르 달려들어 말렸다. 창모의 얼굴이 꽤 지저분해진 뒤였다.  

   

시간은 흘러 우리는 모두 졸업했다. 창모와 친분이 없었던 나는 졸업까지 별 말도 해보지 못했다. 창모를 다시 떠올리게 된 건 몇 년이 지나 전역을 하고도 몇 달이 지난 후였다.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서 술을 먹는데 누군가 불쑥 말했다. 창모 페이스북을 보았냐는 얘기였다. 아무도 몰랐고, 그 자리에서 다 같이 그의 페이스북에 들어갔을 때 우리는 조금 심장이 썰렁해져서 대화를 멈추었다. 창모는 매일 같이 그날의 소회를 몇 줄의 글로 올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용은 ‘맨날 참아주니까 만만하게 생각하네. 한번만 더 건드리면 진짜 죽여 버린다.’, ‘PC방에서 아르바이트한다고 개 무시하는 것 같은데 목을 칼로 뚫어도 무시할 수 있을까?’ ‘이 세상 병신들은 사과를 원해서 사과를 해주면 필요 없다고 욕하네?’ 같은 말들이었다. 몇 달 동안 아무도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데도 그의 공개적인 하소연은 몇 년째 계속되고 있었다.     


어제는 여자친구와 조커를 봤다. 존재감 없이 살아가는 한 인간이 평생에 걸친 무시와 괴롭힘 끝에 광기로 폭주하는 그 섬뜩하고도 쓸쓸한 영화를 보면서, 나는 자꾸만 창모를 떠올리게 됐다. 단지 힘이 약하고 조금 나약하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만성적인 괴롭힘을 당한 사람들은 창모 말고도 얼마나 많을까.      


이 글은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나, 후회 같은 것을 포함하지 않고 썼다. 어설픈 교훈의 글이 되지 않도록. 그냥 그렇게 조커가 되지 못한 조커들을 떠올렸다는 마음 그 자체를 썼다. 단지 그렇게만 읽히기를 바란다. 그냥 오래도록 어딘가에 박혀있던 기억이 떠올랐고. 그걸 글로 적어내고 싶었다. 후련하게 털어버리고 싶은 마음같다. (솔직히 말해서 창모를 보며 안쓰러움을 많이 느끼기는 하였으나, 내가 그보다 더 잘난 누군가여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시 생각해보건대 그를 동정할 이유도 명분도 나에게는 없었다. 어쩌면 그건 졸렬한 우월감이었을 수도 있다.) 영화를 보고나서. 삐뚤어지고 어긋난 채로 사회에 생채기를 내는 조커와, 폭발하지 않은 채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그들을 동시에 떠올릴 수 있었다는 칙칙한 감정글로 남기고 싶어졌다.


“평생을 참아온 나였는데, 나는 지금까지 비참하게만 살아가고, 나를 괴롭힌 애들은 즐겁고 행복하게만 살아간다. 혹시 만나게 되면 면상을 한 대 쳐 갈겨버리고 싶을 정도로 날 만든 신이 증오스럽다.”


창모의 페이스북에는 이런 글도 있었다. (어떤 경우라도 창모가 검색되지 않도록 문장을 조금 다듬었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유독 마음이 아팠다. 그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쉽지 않은 학창시절을 잘 이겨낸 창모에게 앞으로는 좋은 일이 조금 더 많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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