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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Dec 21. 2019

'상병 건강검진'이라는 제목의 일기

군 시절 일기

2012.9월 어느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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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진급 후에 사단의무대로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라는 전파를 받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후반야 근무 후에 잠도 못 자고 출발했지만 나름대로 멀쩡해서 소풍가는 가벼운 마음으로 들떴다. 항상 밤에만 보던 영종대교와 서해바다를 버스에서 다른 각도로 보니 생각보다 괜찮은 풍경이라는 감상이 들었다.


김포는 서울과 아주 가깝지만 웬만한 지방도시보다도 개발이 안 된 곳이다. 시골이나 다름없는 경치가 이어졌다. 인천 쪽으로 오고 나서야 그나마 도시다운 모습이 드러났다. 대형버스 안에서 별 생각없이 창밖을 바라보니 순간 내가 군인이라는 사실을 잠깐 잊었다가, 이내 낯설어졌다.


상병이 되어도 나는 아직 도시의 풍경에 익숙하다. 오묘한 기분이다. 나는 여전히 군인이 아닌 것만 같고, 어쩌면 전역할 때까지 군인이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곧 치킨집, 옷가게, 버스 정류장과 각양각색의 옷을 입은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생김이 신기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나도 모르게 이미 군인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혼자 웃었다.


사단의무대에서의 건강검진은 간단한 엑스선 촬영과 채혈이 전부였다.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로 형식적이었다. 내 팔뚝에서 피를 뽑은 일병 계급의 의무병은 바늘을 몇 번이나 다시 꽂았고, 심지어는 혈관을 찾겠다고 바늘을 쑤시고도 몇 번이나 휘저었다. 피가 멈추지 않아서 알콜솜을 두 개나 더 받았다. 개새끼. 존나 아프다.


오고가는 그 버스 속에서 도시의 세상과 내가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는 실감에 나는 다시 한 번 낯설었다. 물과 기름, 하늘과 바다처럼 멀지않은 곳에 있어도 섞일 수 없는 완전한 타인의 관계같다. 나도 사회도 서로를 너, 나로 구분하고 있다는 생각만 강하게 들었다.


개미들의 세계와 군대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 건 이 감상의 연장이다. 하나의 지구에서, 밟고 있는 땅 밑에는 그렇게나 분명한 존재감으로 개미들의 세계있다. 그들의 세계와, 그들의 영역은 50cm위의 우리와는 무관하다. 지상에 두 발 딛고 서 있는 인간들은 그 세계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렇듯이, 나와 이 세계는 국가 안에서 이렇게나 현현히 존재하고 있는데도. 밖의 사람들은 아무런 의식조차 없구나. 나는 그런 생각에 잠길 때마다 몇 배나 외로워진다.


그러고보니 나는 사회의 일원보다 개미에 가깝다. 어쩌면 나는 개미인지도 모른다. 바닥을 기어다니는 개미들을 보면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들을 밟을까 싶어 오늘은 하루종일 조심조심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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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꺼내보는 군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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