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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Dec 24. 2019

오해하며 살아가는 삶

퓨리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나는 그 영화를 스마트폰으로 침대에 누워서 보았다. 수백 명의 적들이 지나갈 길목에 탱크를 한대 세워놓고 최대한 시간을 벌어주어야 하는 5인의 군인에 관한 영화였다. 시시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생각보다 괜찮은 영화였다. 특히 브래드 피트와 로건 레먼의 연기는 놀라울 정도였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시종일관 누런 톤으로 영화를 표현해냈다는 거였다. 그런 연출은 2차 대전이라는 시대적 특수성을 강조하며 모든 장면들을 마치 빛바랜 사진처럼, 낡은 흑백 영화처럼 보이게 했다. 전쟁의 분위기와 아련하고 비극적인 스토리와도 잘 어울렸다. 나는 화면에서 이어지는 특유의 빛깔과 비장미 넘치는 결말에 감탄하면서 엔딩 크레디트까지 도달했고, 곧 영화를 끄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런데 웬걸. 카카오톡 화면도 누르죽죽했다. 엥? 눈이 휘동 그래 졌다. 알고 보니까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블루라이트 필터를 끄지 않고 본 것이었다. 당시에 한창 눈이 건조하고 뻑뻑해서 블루라이트 필터 기능을 사용했었는데 익숙해져있다 보니 미처 끌 생각을 못했던 것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2차 대전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톤이니 어쩌니 하면서 나름대로의 감상을 펼쳐놓고 있었다.


내가 느낀 누런 톤의 마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마 깨닫지 못했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퓨리>를 누런 톤이 인상적인 전쟁영화로 기억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 오해는 누가 어떻게 풀어줄 수 있을까.


사람은 결코 해결하지 못할, 오해 인지도 모르는 오해를 수백수천 가지쯤 안고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이외에도 나중에서야 오해였음이 드러나는 일들을 수없이 겪었다. 일을 하다 보면 사람에 대한 오해도 수없이 겪게 된다. 내가 타인을 오해하기도 하고, 타인이 나를 오해하기도 하고, 어떤 오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보지도 못한 상대방을 혐오하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면 말랑말랑하고 순하고 재치 있는 사람인 적도 있었다. 나중에는 내가 오해한 사람과 오해하지 않은 사람으로 사람들을 분류하는 것조차 오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오해는 문제가 되지 않아서 넘어가게 되지만 나쁜 오해는 적을 만든다. 그래서 때로 나쁜 오해는 나중에 해명되기도 하고, 좋은 오해는 사람 잘 못 봤다는 실망으로 내 뒤통수를 치기도 한다. 세상에 오해 아닌 관계가 어디 있으며 오해 아닌 현상은 어디 있는가. 그렇게 오해에 대한 생각으로 둘러싸여 오해의 미로에 빠지게 되었을 때 나는 마치 우주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혼란스러워졌다.


작년에는 이러한 생각으로 혼자 소설을 썼다. 상대방이 나를 너무 오해하고 있어서, 이를 바로잡으려고 만났는데, 상대방이 먼저 자신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더라는 이야기.



“음- 루이뷔통이 왜 루이뷔통인 줄 알아요?”


그녀의 음- 소리가 무슨 멜로디 같다. 루이뷔통이라면 명품을 말하는 건가. 그 분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음- 모르겠어요.”


나는 그녀의 음- 소리를 흉내 내며 대답했는데, 그녀는 내가 흉내를 낸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하던 말을 이어나간다.


“‘바렐리’라는 나라가 있어요. 유럽에 있는 나란데 들어봤어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엔에 마지막으로 가입한 나라가 바렐리에요. 그 나라 국민들은 일도 잘 안 해요. 천연자원이 많아서 수입이 안정적이라 매일 노래만 부르고 그림만 그리거든요. 거기에 루이뷔통이라는 이름의 해변이 있어요. 새해가 되면 온 국민들이 다 그 루이뷔통 해변으로 모여서 조개껍질마다 그림을 그리고 바다에 던져요. 내년에 다시 와서 그 조개껍질을 찾으면 사람으로 환생한다는 전설이 있거든요. 그래서 엄청 화려하게 그리는 거예요. 알록달록하게. 찾기 쉽게. 그게 얼마나 예쁘겠어요. 그 모양을 가지고 만든 가방이 대박 난 거죠. 지금도 루이뷔통 본사에서는 매년 루이뷔통 해변으로 가서 조개껍질을 줍고, 그 그림을 가지고 옷과 가방을 디자인 한 대요. 어때요? 신기하죠.”


그녀는 말할 때 자기도 모르게 연기하듯 손을 휘젓는 버릇이 있었다.


“재밌네요. 아는 게 많으시네요.”


“음. 또 있어요. 오해라는 말. 한자가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글쎄요. 전 한자는 잘 몰라서. 그 ‘오답’, ‘오인사격’할 때 그 ‘오’자랑 ‘이해하다’ 할 때 그 ‘해’자 아닐까요.”


“근데 아니에요. 오해는 한자로 다섯 오. 바다 해. 그렇게 써요.”


여름 씨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실실 지으면서 내 표정을 살폈다. 내가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것도 모르냐는 식으로 얼굴을 익살스럽게 구기면서 손가락으로 지적하는 듯한 제스쳐를 했다.


“아, 그래요? 왜지?”


“지구에 바다가 다섯 개가 있잖아요. 오대양 육대주.”


“아 오대양 육대주. 그쵸. 뭐더라,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또 뭐였죠?”


“북극해, 남극해. 그렇게 해서 오대양이에요. 그러니까 사람이 무언갈 오해한다는 건, 그 대상과 다섯 개의 바다만큼의 거리를 두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죠. 잘못 아는 건 그만큼 거리가 생기는 거니까. 진실과.”


바다를 다섯 개라고 세어도 되나? 잠시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위의 '그녀'가 한 말은 모두 그럴듯한 거짓말이다. 소설 속 '나'는 어쩌면 평생 오해를 다섯개의 바다라는 뜻으로 알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오해의 삶이 인생을 거짓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세계는 오해로도 굳건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그런 오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다는 것이 그 증거다. 내가 <퓨리>를 오해했어도 내 세계에 흔들림이 없었듯이. 그게 오히려 영화에 대해 더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듯이.

오해하면 오해하는대로 오해하지 않으면 않은대로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건 참 아이러니하고 우습다. 산다는 것은 언제나 느끼듯이 실없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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