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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un 03. 2020

망하는 싸움

- 성숙하게 싸우는 법

대학원 졸업을 위해서는 교육봉사시간을 채워야 했다. 중고등학생 멘토링을 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마지막 학기까지 교육봉사를 미루고 또 미뤘기 때문에 일주일에 두세 시간씩 해서는 60시간에 달하는 할당량을 채우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일주일에 다섯 번 하루 네 시간. 초등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돌봄교실이라면 수학적으로 단 3주 만에 모든 봉사시간을 채울 수 있었다. 공고를 찾아 학교에 전화를 했다. “선생님 제가 논문도 써야하고, 시간이 없어서...” 나는 졸업학기라 시간이 없다는 점을 설명했고, 선생님들도 양해를 해주셨다.


초등학교 1학년과 뭔가를 해본 게 언제였더라. 까마득했다. 군대에서 갓 전역하고 일했던 롯데월드에서 꼬마바이킹을 운영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나에게 일곱 살, 여덟 살짜리 애들은 영리하고 사악한 침팬지와 같았다. 그들은 연간회원권을 내 눈동자 바로 앞까지 들이밀며 거들먹거리는 존재였다. ‘나 이런 사람이야.’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녀석들의 그 거만한 자세, 알아서 대접하라는 애띠뜌드가 트라우마처럼 아직 남아있었다. 봉사활동을 제대로 끝마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봉사활동 첫 날. 초등학교는 내가 알던 초등학교가 아니었다. 활짝 열려있어 아무나 드나들 수 있었던 내 어린 날의 학교는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보안관 옷을 입은 할아버지들이 출입자를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학부모들도 예외는 없어서, 자녀들이 학교 밖으로 나올 때까지 바깥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학교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가 찢어질 듯한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꾸중을 들었다.


어찌어찌 봉사활동이 시작됐고, 의외로 적성에 잘 맞았다. 실로 오랜만에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을 접했기 때문에 당황스럽거나 놀랄 일도 많았지만 그런대로 재미있었다.

 

애들은 애들인지, 당연한 것도 의외로 설명이 필요했다. 순서를 정하기 위해서 가위바위보를 하는데, 이것들이 손을 내고 난 다음에도 변화무쌍하게 손가락 모양을 바꾸고 있었다. 애들은 가위바위보를 승부가 계속 뒤바뀌는 실시간 대전게임으로 만들었다. “한 번 냈으면 끝이야. 바꾸면 안 돼!”라는 말을 뱉으면서, 이걸 설명을 해야 되는 거구나... 신선한 충격으로 혼잣말 했다.

반대로 몇몇 아이들은 사람다루는 솜씨가 어른 못지 않았다. 능란한 말솜씨로 나를 종종 당황시켰다.


“선생님. 내일 저 안 와요.” “어, 그래? 왜?” “내일 엄마랑 놀이공원에 놀러가거든요.” “그래? 수민이 좋겠네?” “선생님 저 안 보니까 좋으시겠어요? 쌤 저 별로 안 좋아하시잖아요.” “무슨 소리야~ 쌤이 수민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보고 싶지.”

대화가 거기까지 진행되었을 때, 나는 이 아이가 어른에게 죄책감을 심어주며 심리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법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무서움과 놀라움의 감정이 반반씩 들었다.


이처럼 영악한 아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사실은 대부분이 너무 귀여웠다. 사악한 침팬지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은 실제로 꼬마천사 그 자체였다. 결혼이라든지, 출산 같은 일은 내 인생과 무관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마음도 완전히 뒤바뀌었다. 아이들과 뒹굴며 놀다보면 때로는 아이의 부모들이 너무 부러워서 화가 나기도 났다. ‘이 귀여운 애를 데리고 같이 살 수 있다니! 세상은 불공평해!’ 그럴 때면 아이들의 이름을 모조리 김씨로 바꿔 불렀다. 내 멋대로 성을 바꿔 부르면서 ‘김00! 오늘부터 쌤 동생이니까 우리 집에 가야된다’고 했다. “안돼요~ 난 우리 엄마 꺼에요.” 아이들이 저항해도 “아니야 넌 이제 내 동생이야.” 그렇게 설득했다. 물론 통하진 않았다.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같이 지내면서 너무도 행복했으나 난처한 일은 매일 있었다. 간식을 먹지 않는 일,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우는 일, 무릎에 올라와 앉는다는 걸 말리는 일, 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산만하게 뛰어다니는 일 등 내 역량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도처에 널려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당황스러웠던 건 아이들이 싸울 때였다.


내가 보기에 아이들의 싸움은 항상 책임소지가 분명했다. 쌍방과실인 경우는 거의 없고, A가 B를 때렸다든가, C가 D의 물건을 빼앗았다든가 뭐 그런 일들이었다. 명쾌하게 매듭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아니 쟤가 먼저~” “너도 저번에 그랬잖아~”같은 대사가 나오기만 하면 싸움은 거의 한일양국의 독도분쟁처럼 아득해졌다.


“오빠 오늘은 어땠어?” “말도 마. 오늘도 그 ‘망하는 싸움’이 몇 번이나 있었어.” 집으로 돌아가면서 당시 여자친구와 자주 전화를 했다. 여기서 망하는 싸움이란, “니가 먼저~”라든가 “너도 저번에~” 로 시작하는 싸움을 내 나름대로 정의한 것이었다. 아이들은 항상 저 단어로 싸우는 바람에 꼭 파국으로 치닫는다고, 너무 중재하기 난처하다고 여러 번 얘기했었다. 여자친구는 ‘망하는 싸움’이란 단어가 너무 재밌다고 깔깔댔다.


정말정말 부끄러운 얘긴데, 그래놓고 그 여자친구와 나는 ‘망하는 싸움’으로 헤어졌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오빠도 그랬잖아!” “네가 먼저 그랬으니까 그랬지!” 망하는 싸움 어쩌고 하며 깔깔대던 커플이었는데, 생각해보니 나와 그녀가 정확히 8살의 방식으로 싸우다 헤어졌다. “하이고. 00아. 잘못했으면 사과를 먼저 해야지!” 아이들에게 훈계하던 나는, 알고 보면 자격도 없이 잘난 척을 한 것이었다. 정작 나는 그 언제든 성숙하고 품위 있는 싸움을 해본 일이 있었던가. 부끄럽게도 기억나지 않았다.


침대는 질문으로 가득해졌다. 8살하고 놀다보니 8살처럼 되어버린 것일까. 혹시 나는 8살로부터 조금도 성장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성숙하게 싸우는 법은 어디에 가면 배울 수 있을까. 나는 평생 8살을 벗어날 수 없는 걸까.


탑골공원에서 보니까 할아버지들 장기 두다가 막 싸우고 그러던데. 장기판을 엎으면서 삿대질을 하는 할아버지들처럼 나도 그렇게 초라하게 늙어 갈까봐 두려웠다. 니가 먼저어- 너도 저번에에- 아이들이 하던대로 멜로디까지 넣어서 발음해보았다. 정말 입에 착착 달라붙었다. 어우. 끔찍하게 유치해. 깊은 밤, ‘망하는 싸움’으로 산산이 깨진 연애가 생각날 때마다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유치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잠에 들었다.





그림: @pain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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