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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un 04. 2020

제 키는 176cm입니다

키와 나의 상관관계

외모와 성격에는 긴밀한 상관관계가 있다. 태어날 때부터 키가 크고, 힘이 세며, 우악스럽게 생긴 남자는 아무래도 언변이 뛰어날 확률이 적다. 그에게는 아주 어릴 때부터 설득보다는 무력의 효과가 더 즉각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들은 인상 한 번만 써도 원하는 것이 주어지기에 애써 상대방을 구슬릴 필요가 없어진다. 부족한 말솜씨를 보완하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외형적 조건의 사용법을 익히게 될 것이다.


남자든 여자든 아주 예쁘게 태어나도 그 나름대로의 운명이 주어진다. 우월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은 치열하게 어떤 기술을 숙달하기보다는 자신의 매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진작에 알게된다. 꾸미는 대로 예쁘고, 새로운 시도를 해도 성공적이니 그 방면에 관심을 가질 공산 또한 크다. 연애 경험도 자연히 많아질 수밖에 없고, 외모를 보고 접근하는 불량한 무리에 편입될 가능성도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바람에, 벗어나든 발목을 잡히든 어떻게든 성격형성에 영향을 받게 된다.


내 성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요소는 키였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키번호 3번을 넘긴 적이 없을 정도로 작은 키의 대명사였다. 내가 5월생임에도 불구하고 1년이나 입학을 빨리 했기 때문에 작은 키가 더 부각된 면도 있었다. 원래 또래들 사이에서도 작은 키인데 월반이라니. 그래서 나의 경우에는 자연히 말이 늘게 되었다. 놀거나 활동을 할 때, 내 뜻대로 무엇인가를 관철시킬만한 힘이 '말'이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키 작은 남자아이의 어머니들은 "남자는 군대가도 큰다더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해주시고는 한다. 그 말은 산타클로스와 같다. 처음에는 철썩같이 믿다가도 나중에는 현실인식을 하게 되니까. 나또한 중학교 졸업 즈음해서는 그 말이 그저 나를 위한 위로의 말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도 포기를 조금씩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럴수가. 뒤늦게 키가 크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1학년 입학 당시만 해도 163cm였던 내 키는 고등학교 2학년으로 들어갈 때 170cm까지 크더니, 졸업 즈음해서는 173cm를 기록하게 됐다.  


죽다 살아난 사람들은 이후의 시간을 덤으로 얻은 삶이라고 생각한다는데, 나는 173cm를 덤으로 얻은 키라고 생각하며 감사해했다. 183cm인 형도 별로 부럽지가 않았다. 그런 겸손한 마음 때문인지 키는 174cm를 넘어가더니 신검 때는 175cm까지 기록하면서 커리어하이를 찍었다. 남자에게 병역판정 신체검사. 이른바 '신검' 기록은 뭔가 국가공인 '키 자격증'같은 개념이기도 한데, 거기에서 175.0을 달성하면서 나의 기세는 한껏 올라갔다. 그때부터 나는 세상에서 자신의 키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되었다. 180이하는 루저라는 식의 발언이 전국적으로 이슈이던 시절이었는데,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장난삼아 "난 루저야ㅠ"라고 뱉은 적은 있어도 마음 속으로는 늘 "나는야 175의 사나이!" 하면서 찡긋 윙크를 했다.


내 키부심은 군대에서 한층 강화되었다. 조교들은 우리가 훈련소에 들어오자마자부터 수료식을 준비한다고 난리였는데 알고보니 사단장님도 오시고, 가족들도 방문하는 행사여서 아주 중요한 거였다. 우리는 칼같은 제식훈련과 사단가를 틀어놓고 하는 율동 같은 것을 지겹게 연습했다. 이 중요한 행사에는 한치의 빈틈도 허용되지 않았는데, 줄세우기도 마찬가지였다. 키를 아주 세세하게 쟀다. 일단 눈대중으로 200명 정도 되는 인원들을 키순서로 세운 뒤 옆사람과 비교하며 자리를 바꾸고, 바꾸고, 바꾸고, 바꿔서 결국 앞열부터 뒷열까지 점점 높아지는 아름다운 크레센도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모든 인원들의 키가 결정되었을 때, 나는 100명중 거의 70번째로 뒤에 서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나는 100명 중에 30번째로 키가 큰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키에 대한 일말의 거리낌이 없어졌다. '나는 생각보다 무척 키가 큰 사람이다.' 그런 자부심으로 가득해졌다. 175의 신화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군대에서 전역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이상하게 175인 남자들이 너무 많았다. 이상한 점은 그들이 나보다 아주 미세하게 작아보였다는 것이다. 내 키의 최고기록이 175.0cm이었으므로 지구상의 모든 175cm중에서는 내가 제일 작아야 했는데, 이상하게 175들이 하나같이 나보다 작았다. 그건 사람들이 키를 속였거나, 나의 키가 컸다는 얘기였다.


그 의문은 얼마 뒤 병원에 갈일이 생겨 키를 재보았을 때 비로소 풀렸다. 내 키가 176.3cm 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남자는 군대가도 큰다더라"는 어머니의 말씀은 진실이었다.(적어도 나에게는) 그 무거운걸 이고 지고 그렇게 걸어다녔는데도 무릎이 짜부라지기는 커녕 키가 컸다니, 실로 기쁜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나는 "나는야 176의 사나이!"하고 찡긋할 수도 있게 되었다.


작은 키는 나에게 어떤 운명같다. 작다는 핸디캡 때문에 열심히 친구들을 말로 구슬리느라 화술이 늘었고, 피지컬 좋은 친구들에 비해 불리한 스포츠보다는 책 읽기에 흥미를 붙이게 되었다. 아마 그런 영향으로 전공도 국어를 택하게 되었고, 이렇게 취미로 글도 쓰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나의 성향과 취향이 썩 마음에 든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조건들이 긍정적인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니었지만 작은 키로 유년시절을 보냈던 것 만큼은 만족한다. 생각한 바 그대로를 말하고, 느낀 바를 표현할 수 있음은 대부분이 작은 키에서 왔다. 이후에 176cm의 어마어마한 장신까지 되었으니 그야말로 단물만 쏙 빼먹은 것이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이렇게 헌정하는 글도 절로 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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