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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an 02. 2017

손톱 물어뜯기에 대하여.

- 지긋지긋한 버릇과의 연애

 

내 나이도 2017년을 맞이하면서 어느덧 스물여섯이 되었다. 스무 살 보다는 서른에 가까워진 나이. 뭔가 이제는 어른이 아니라고 하는 게 더 어려운 나이이지만, 여전히 어른은 아닌 것 같은 불안함 속에 있다. 결코 적은 나이는 아니되, 탁 트인 공간에서는 절대 자랑할 수 없는 나이. 누군가에게 한없이 어리고 파릇한 나이. 가소롭게 비웃음 당하는 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적어도 대학교에서만큼은 나보다 더 파릇하고, 미숙하며 어리숙한 동생들을 만나면서 우쭐댈 수 있었지만, 사회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그야말로 신생아와도 같은, 그런 시시한 나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나는 스무 살의 벽을 통과하려고 하거나, 갓 통과해낸 사람들에게만큼은 나름대로의 인생관, 연애관을 멋들어지게 설명할 수 있으나 여전히 세계를 구성하는 대다수의 어른들에게 있어서 사랑도 인생도 모르는 허접한 존재인 것이다.

스물여섯이라는 건 적당히 그런 나이인 것 같다. 모든 나이는 아주 상대적이기도 하다. 내가 스무 살 무렵부터 느꼈던 절망 중 하나는, 나이의 질량이 사람마다 아주 다르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부터 드라마를 통해 유행하는 시 구절 중에 이런 말이 있더라.

‘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

나에게는 이 문장이 나이를 두고 쓴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내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세상은 온통 처음이란 것으로 가득했지만, 스물의 누군가는 세계를 유랑하며 노래하는 슈퍼스타였고, 혹은 여행가였으며, 4만 관중이 운집한 스타디움 정중앙에서 프리킥을 차는 프로선수였다. 같은 스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그들과 나는 겉보기에는 스무 살이라는 테니스 공이었지만 저울에 재면 그 무게는 천차만별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서 내 스물여섯이라는 나이의 크기는 동 나이대의 수많은 사람들과 같은, 이를테면 야구공보다 조금 커진 소프트볼이 되었지만 그 무게는 여전히 천차만별로 차이가 나는 것 같다.

내 나이대의 누군가는 촉망받는 스타트업의 사장이거나, 잔뼈가 굵은 배우거나, 유능함을 인정받아 천문학적인 연봉을 제시받으며 팀을 여러 번 옮긴 축구계의 괴물로 살고 있다. 여전히 질량의 크기를 나는 느끼고 있는 것이다.     

스물여섯이라는 건 적당히 그런 나이인 것 같다. 나의 평범함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내 나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습관처럼 앞으로도 이어지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 나는 점점 평범함에 익숙해지고, 안전함을 좇고, 더 현실적인 생각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안타까워했다.

한 가지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 새해가 되니 다시금 의욕이 샘솟고 어떤 희망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염세적이고 허탈한 마음을 가중하면서 나이가 들면 언젠가는 새해가 돼서도 전혀 새로운 영감을 얻지 않을 것이라는 걸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만족스러웠다. 아직의 내 자신에게.    

 

누군가가 몇 백억을 굴리면서 사업을 하고 있는 스물여섯의 나이에, 나는 부끄럽게도 손톱을 물어뜯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어떤 불안감을 느낄 때. 정적을 참을 수 없을 때. 뭘 해야 될지 모를 때.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등 무엇인가 집중할 때 나는 손톱을 깨문다. 벌써 이 일을 한지도 십년이 넘어서, 일만 시간의 법칙에 따르면 나는 손톱 물어뜯기의 권위인지도 모른다.


하루는 지하철을 탔을 때 였는데 핸드폰을 쳐다보면서 손톱 깨무는 40대 남성을 보았다. 뭐랄까. 아주 패배자 같은 느낌을 받았다. 찌질하고, 뭔가 불안해하는 것 같은, 나약한 이미지가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콱 쥐어박고 싶었다고나 할까. 그리 아차 싶었던 것은. 내가 손톱을 물어뜯고 있을 때 나도 이렇게 한심하게 보이리라는 자각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손톱을 물어뜯었지만 사람들이 많은 밖에서는 의도적으로 절제했다. 내가 손톱을 물어뜯는 순간은 보통 혼자 있을 때 (혹은 집에 있을 때)이다. 그래서 내가 그런 버릇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아주 많다. 때로 내가 손톱을 물어뜯을 때마다 몇몇은 아주 놀라서, ‘아니 너에게 그런 버릇이 있었니?’ 되묻기도 한다.     

 

나는 왜 손톱을 물어뜯을까?

심리학적으로 다양한 견해가 있겠지만 굳이 그런 걸 찾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도무지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에 부딪혔을 때, 내 힘으로 컨트롤 가능한 행위를 본능적으로 실행하려는 것이다. 손톱 물어뜯기는 거슬리는 손톱의 일부를 잠깐의 노력으로 해소할 수가 있다. 입술과 앞니를 이용해서 조금씩 뜯어내거나, 벗겨내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해낼 수가 있다. 손톱 물어뜯기는 꼭 정리의 목적으로 손톱깎이처럼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거슬리는 손톱위의 껍질을 가죽 벗겨내듯 샥! 하고 벗겨 내거나 큐티클을 뜯어낼 때의 쾌감을 느끼는 것에 가깝다.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을 컨트롤 할 때 일종의 심리적 안정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스물여섯이 되어서도,(자랑하기에 턱없이 부끄러운 나이인 것을 알기에 절대 ‘내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가 아님을 이해해주시길.) 여전히 나는 느낀다. 이토록 불완전하고 불안한 존재구나. 나보다 연약한 사람들 앞에서는 뽐내듯 당당하지만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세계에서 나는 손톱에 의지할 만큼 나약하구나.      


나는 나의 이 오래된 습관을 통해 일종의 자괴감을 느끼면서. 새해에는 불안함과 멀어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 팔십이 넘어서 손톱을 물어뜯는 나를 상상하면 솔직히 좀 꼴보기 싫은 것도 사실이다. 허나 어쩌랴 이런 나를 사랑해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 또한 만고의 진리인 것을.     


어찌어찌 새해가 왔다. 스물여섯은 한참이 더해져도 어린 나이이고,(새해의 첫날 나의 친형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더라. "네가 이제 스물여섯인가? 캬. 스물여섯. 부럽다.") 나는 이런 나쁜 버릇 속에서도 나를 탐구할 줄 아는 멋진 남자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다가온 2017년을 기쁘게 맞이하기로 했다. 내 삶의 신조는 흐르는 물의 방향을 억지로 바꾸지 않는 것이니까, 나는 앞으로도 화날 때 화를 내고, 슬플 때 슬퍼하고, 안 좋은 버릇은 썰물에 쓸려가듯 흘러가기를 기다리면서 나의 이 자연스러운 감정을 사랑할 것이다.      


...



그래도 손톱 물어뜯기는 고치는 편이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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