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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Aug 20. 2020

태몽이 없는 남자

- 나의 정체성

어릴 때는 그런 것들 궁금해 하지 않나. 내 이름의 뜻은 뭔지, 누가 지었는지, 태몽은 어땠는지, 내 성씨의 유명한 조상님은 누구고, 나는 몇 대손인지, 양반은 맞았는지...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다닐 때는 그런 주제로 친구들과 얘기를 곧잘 했던 것 같다. 객관적으로는 검증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은데도, 확신에 차서 이야기했고, 보통 친구가 얘기하는 대로 믿어주었다.     


친구들은 자주 자신의 태몽을 자랑했다. 용이 어쩌구 호랑이가 어쩌구 별이 어쩌구 하는데 인플레이션은 화폐경제에만 있는 게 아니라 태몽 쪽에도 있는 모양이었다. 강북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자식들 주제에 죄다 비범한 탄생설화가 있었다.     


나의 태몽에 대해서 들었던 날을 기억한다. 먼저 형이 어머니에게 물었는데, 대답은 이랬다.


“엄청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고, 엄마는 물가에 있었는데, 그 맑은 물속에 엄청나게 큰 연어 한 마리가 제자리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거야. 그 자리에서 가만히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그걸 양손으로 꺼내서 번쩍 들어 올렸는데, 아마도 그게 태몽인 것 같아.”     


형은 만족해했고, 나도 재밌게 들었다. 하지만 내가 정작 궁금한 것은 나의 태몽이었으므로, 내 태몽에 대해서도 곧바로 묻게 되었다. 엄마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눈동자가 왔다갔다 돌아갔다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으셨다.     


“엄청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고,,,”     

“엄마, 그건 형 태몽인데요?”  

“음... 네 태몽은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리하여 나는 태몽이 없는 남자가 되었다. 지금의 나는 오히려 태몽이 없다는 것을 재미난 이야깃거리처럼 말하고 다니지만, 어릴 때는 태몽도 없이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이 괜히 부끄러워, 형의 태몽을 내 것처럼 말하고 다니곤 했다. 친구들은 심드렁해했지만 어른들은 그 맑은 물과 연어가 등장하는 태몽을 들을 때마다 용이나 호랑이가 등장하지 않는 참신하고 애틋한 스토리에 은은한 웃음을 보이는 편이었다. 이렇든저렇든 태몽 얘기가 나올 때마다 나는 늘 조금씩 쑥스러웠다.     


태몽뿐만이 아니라, 나는 사실 이름에도 큰 뜻이 없다. 그 이유를 알려면 먼저 형의 이름부터 설명해야 한다. 이전에도 한번 글로 쓴 적이 있었지만, 우리 형의 이름은 ‘우주’다. 어머니가 지으셨는데, 형을 가졌을 때 ‘우주’를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셨다고 한다. 이토록 감동적인 작명을 지금껏 나는 들어본 바가 없다. 그리고 형의 이름에 대해서 알게된 직후 내 이름이 왜 ‘우빈’이냐고 물었을 때, 엄마는 이번에도 간단하게 대답하셨다.      

“처녀 때부터 늘 아들 이름에 ‘빈’자를 넣고 싶었어.”     


그러니까, 이름에 막연히 ‘빈’자를 넣고 싶었는데, 첫째가 ‘우주’니까 ‘우’자에다가 ‘빈’을 넣어 ‘우빈’이 되었다는 얘기였다. 나는 그게 뭐냐고. 잔뜩 실망했지만, 내가 실망하거나 서운해한다고 해서 이름의 유래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더 불만을 표할 수도 없었다.     


다행인 점은 그래도 표면적인 이유를 만들어주시기는 했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하냐고 묻자 이 또한 어머니는 간단하게 대답해주셨다. 집 우(宇)자에는 세상이라는 뜻이 있고 빛날 빈(彬)자는 빛낸다는 뜻이 있으니, 세상을 빛내라는 뜻이 된다고 하셨다. 그렇게 말하면 된다고. 말씀대로 나는 그 설명을 잘 듣고, 주변에서 이름의 뜻을 물을 때마다 그대로 설명하며 살아왔다.     


몇 년 전부터 나는 태몽이 없고, 이름의 의미가 오로지 어머니의 기호(嗜好)였다는 점을 나의 정체성으로 삼는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지어냈는지도 모르는 대중적 태몽 없이 심플하고 솔직하게 태몽이 없었다는 것은 의외로 나만의 개성 있는 이야기가 된다. 더구나 나의 태몽 대신 형의 태몽을 소개할 수 있기 까지 해서, 두 배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기분이다.      


오로지 어감이 예쁘다는 이유로 지어진 이름 또한 얼마나 참신한지. 나는 내 이름에 자부심이 많은 편이다. 늘 예쁜 이름이라 느꼈다. 남자이름치고 유약해 보이는 유빈이라는지 수빈이라든지 하는 이름보다 ‘우’자가 주는 묵직함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돌림자가 아님에도 나의 이름과 형의 이름이 같은 한자로 이어졌다는 것도 좋다. 형과 나의 이름에 심지어는 위치도 같은 쪽에 집우(宇)자가 이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주’를 가진 것처럼 기쁘셨다는 그 마음이 분명 나에게도 동어반복처럼 적용된다는 확신이 생긴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내려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는 법이랬다. 나는 태몽이나 이름을 가지고 남들처럼 예비된 정체성을 찾을 수는 없지만, 내가 살아가고 생각하는 방식을 보면 태몽과 이름의 의미 없음이 오히려 나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 같다. 내 생각에 나는 정해지지 않고 준비되지 않은 의미들을 열심히 만들어나가는 운명을 부여받은 사람이다. 그것이 나의 태몽이고, 내 이름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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