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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Aug 07. 2020

기억의 정거장을 지난다

- <기억의 정거장을 지난다> 서댐-고양이와 나의 상대성이론


https://tumblbug.com/subwaystation 


스물 두 명의 작가들이 지하철역을 지날 때 떠오르는 이야기를 묶었습니다. 저도 한 편을 싣게 되었어요. 관심 있으신 분들은 펀딩에 참여해주세요.        


   


기억의 정거장을 지나면서  

- 철없는 자, 사랑의 글쓰기



“들겠지.”

“뭐라구?”

“철이 들겠지. 나이가 들면”     


지난 주말에는 친한 누나와 밥을 먹었다. 동묘앞역 근처에 있는 쭈꾸미삽겹살 집. 적당히 매웠고, 쭈꾸미는 싱싱하고 쫄깃했으며 묵사발의 간이 기가 막혔다. 쭈꾸미파전도 시켰는데 진한 마가린향과 더불어 쭈꾸미가 폭탄처럼 투하되어있었다. 누나도 워낙 재미있는 사람이라 나는 밥을 먹는 내내 계속 깔깔깔 웃었다. 술을 마시면서 이런저런 주제로 시작된 대화는 각자의 이성관이라든가, 연애관, 추억 쪽으로 흘러갔다.      


나는 내가 좋아했던 여자들, 좋아하는 여자들에 대해서, 그리고 매번 연애를 망친 이유나, 연애를 새로 시작할 수 없는 이유들에 대해서 한참이나 떠들었다. ‘나이가 들면 철이 들겠다’는 그녀의 대사는 그 긴 대화의 어느 쯤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바꿔 말하면 ‘아직 철이 덜 들었다.’는 얘기였다. 부정할 수도 없었고, 크게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너랑 사귀면 피곤할 거 같애”


누나는 그렇게 말했다. 슷한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매번 이유는 조금씩 달랐지만, 겹치는 이야기가 있었다. 아무한테나 잘해주고, 헤프게 웃고, 그래서 남자친구로 두면 어디가서 ‘흘리고’ 다닐까 봐 신경이 많이 쓰일 것 같다는 얘기였다. 그러고보니 대학원에서 만난 내 친한 남자친구도 그랬다. 내 장점이 뭐냐고 묻는 말에 “너? 살갑지.” 하고 대답했다. 옆에 있던 다른 동기도 그 말에 동의했다. 나는 살가운 사람인데, 한편으로는 좀 가볍게 느껴지기도 하는구나. 작게 끄덕거렸다.     


평범한(혹은 심심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살가운 덕을 봤는지 드문드문 연애를 계속 했다. 그리고 그 연애의 기억들은 언제나 나에게 가장 강렬한 자극을 준 것 같다. 글을 쓰려고 앉으면 언제나 연애라든지, 사랑에 관한 글을 떠올리게 된다. 좋은 글을 쓰려고 몸에 힘을 잔뜩 줄 때. 혹은 글쓰기 클래스에서 남들에게 보여주는 글을 쓸 때, 이번 『기억의 정거장을 지난다』처럼 청탁을 받아 글을 쓸 때, 내 인생의 모든 클라이막스가 이성과 있을 때 일어났던 것처럼 나는 무엇보다 사랑에 관한 글에 이끌린다. 그게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지다가도, 때로는 조금 허탈하거나 스스로가 조금 게 느껴지기도 했다.     


늘 사랑에 대해서 고민하고,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채울 수 없는 모자람과 그로 인한 무력감에 휩싸인다. 말로만 지껄이면서, 실제로는 하찮고 한심한 사람인 것 같아서 자괴감도 든다. 영원을 속삭이는 사랑을 하고 싶다고 되뇌면서 언제나 순식간에 사랑에 빠지고, 금방 깨어나고, 증을 느끼고, 또 금방 설레고 한다. 어떨 때는 지하철을 타고 어디를 가면서 타고 내리는 여러 여자들에게 몇 번씩이나 새롭게 반한다. 깨닫고 한심해한다.     


『기억의 정거장을 지난다』에서 나는 신분당선 광교역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작년 봄, 연애의 한 기억이다. 지하철역을 고민하고, 또 그에 맞는 이야기들을 떠올리면서 그녀와의 시간들이 문득 떠올랐고, 그때의 감정을 글로 옮기기 위해 오래 고민했다. 3주 동안 나는 브런치에 새로운 글을 한편도 쓰지 않고 그 글을 써내려고 궁리했다. 수 십 번 새로 썼지만, 내 마음속에서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마음을, 끝내 그대로 옮기지는 못했다. 애써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게 글쓰기니까 어쩔 수 없이 타협했다.     

 

“들겠지.”

“뭐라구?”

“철이 들겠지. 나이가 들면.”     


누나의 말을 듣고, 사실은 조금 부끄러웠지만 그 다음에는 그래도 괜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철이 안 들어서 그렇게나 쉽게 사랑에 빠지고, 그래서 글 쓰는 사람으로서는 덕을 많이 본 것 같다고.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온몸으로 흡수하면서 추억을 만들고, 조금씩 철이 들어가는 그 어디쯤을 살고 있는 것 같다고. 그런 생각을 혼자서 했다. 앞으로도 사랑에 빠질 준비를 하다가, 혹시라도 누구를 만나게 되면 충분히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이가 들면 철이 들겠지.’ 그 말을 혼자서 중얼거리고, 언젠가 철이 들 때까지 조금씩만 더 좋은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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