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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Dec 21. 2020

축가로 축하한다는 것

-11월, 친구 결혼식 축가

10월에 있었던 결혼식 사회를 마치고나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아직 불편함이 남아있었다. 11월에 친구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기로 했기 때문이다.


대학 동기가 청첩장을 보내왔을 때는 사실 조금 놀랐다. 축가를 부탁한다는 말은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노래잘하는 사람으로 또 가까운 사람으로 인정받은 것 같아서 기쁘기도 했다. 전화를 하면서 축하한다고. 신기하다고. 그런 얘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아, 결혼이라니. 나는 아직도 베르나르 베르베르 소설 읽던 중학생 같은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더디게 철이 드는데, 주변에서는 하나 둘 씩 어른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스무 살 이후 줄곧 느낀 감정이다.


얼마 전 동아리 선배가 결혼했을 때에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오랜만에 만난 동아리 선후배들은 결혼식이 끝나고 같이 밥을 먹으면서, 합주하고 공연하고 술 먹던 이야기들을 실컷 늘어놓았다. 예전 같으면 그런 이야기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겠는데, 이제는 결혼이니 주택청약이니 대출이니 하는 주제로 금세 전환됐다. 학생회관 옥상에서 소주를 마시며 기타를 치던 낭만적인 형들은 자연스러운 자세로 아파트, 땅 얘기를 했다. 그게 너무 세속적이어서 멋이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사실은 조금 했다.) 그냥 음악얘기만 실컷 할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대학 때는 “요즘 뭐 듣니? 이거 한 번 들어볼래?” 같은 이야기만 했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영화 얘기, 연애 얘기, 음악 얘기...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무용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가 즐거운 사람같다. 조금 섭섭했다.


어른의 세계에서 사회를 보고, 축가를 부르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나도 완전 어른처럼 보이겠지. '어른'이라니.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다. 예전에 봤던 책에서는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성인식의 부재‘라고 했다. 예전에는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큰 돌을 옮기거나,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거나, 몸에 문신을 새기거나, 장신구를 몸에 끼우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고난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소년 소녀는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은 후, 비로소 자신이 어른이 되었음을 납득하고, 주위로부터 인정받았다. 하지만 현대사회에는 성인식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아서, 성인으로 거듭나지 못한 채 자라나는 어른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어른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나이 들어버린 나 같은 사람을 보면, 그게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넘거나, 들짐승을 사냥하거나, 불로 된 길을 맨발로 건너가는 의식이 나에게는 필요했을 것 같다고. 축가를 준비하면서는 자꾸만 그런 생각들을 했다.


노래는 성시경의 ‘두 사람’으로 정했다. 너무 흔한 게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게 무슨 공연은 아니니까. 가사가 좋고, 내가 잘 부를 수 있는 노래로 골랐다. 잘 알고 있는 노래라고 생각했는데 가사가 엄청 헷갈려서, 완벽하게 외우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결혼식 일주일 전까지는 또 마음 놓고 있다가 거의 닥쳐서는 계속 듣고, 부르고, 녹음하면서 연습을 반복했다.


결혼식 당일, 웨딩홀 직원의 실수로 리허설 시간을 주지 않는 바람에 당일에는 따로 연습을 해볼 수 없었지만 다행히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노래를 마쳤다. 내가 노래를 잘 마쳤다는 기쁨보다는 친구의 한 번 뿐인 소중한 결혼식을 망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노래로 결혼을 축하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는 지금까지 총 세 번 축가를 불러보았는데, 매번 축가를 앞두고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은 슬픔을 도저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서 울고, 기쁨을 도저히 표현할 수 없어서 웃고, 축하하는 마음, 슬퍼하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노래를 만들었을 것이다. 언어로는 불가능한 마음을 노래에는 담을 수 있으니까.  여러 고민과 함께 성의있는 마음을 담으려고 노력했지만, 이래저래 조금 모자란 기분이 든다.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진심이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축가는 한 명이 아니라 모두가 불러줘야 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모든 하객이 한 목소리로 불러주는 축가야 말로 진짜 노래로 하는 축하가 아닐까. 그걸 대신해서 한 명이 부르는 게 축가라면, 이 얼마나 무거운 책임인지.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한 나는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도. 내가 부른 축가를 회상하면서 다시 한 번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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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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