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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an 10. 2021

취향이 다를 수 있음

-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취향

나와 맞지 않는 타인의 취향이란 나와 혈액형이 다른 타인의 피처럼 느껴진다. 나랑 혈액형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완벽히 이해하면서도 그의 피를 절대로 수혈 받을 수는 없는 것처럼. 나와 취향이 다를 수 있다는 건 알겠어도,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이 든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성이 편 씨였던 친구가 있었다. (한동안 제일 친한 친구였는데 놀랍게도 이제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럴 수가.) 그 친구의 아버지는 해외 유학파 출신으로 매우 능력 있는 분이셨는데, 그 친구도 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서 그런지 말과 행동에 ‘배운 집안’의 아우라가 있었다.      


나는 그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것을 좋아했다. 집에 노트북이 있어서, 그걸 가지고 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도 컴퓨터는 있었지만 노트북은 키보드 특유의 질감이라든가 배열도 독특했고, 영화 속의 해커가 된 기분도 났다. 야후 코리아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괜히 검색하면서 놀았던 기억이 난다. 사이트 주소를 입력할 때, ‘떠블유떠블유떠블유’라고 하지 않고 늘 ‘더블류더블류더블류’라고 말하던 친구의 발음이 인상 깊었다.    

  

그 친구의 집에는 간식도 많았다. 우유에 타먹는 ‘재티’도 늘 찬장에 있었고, ‘노마 골드’같은 어린이 영양제도 쌓여있었다. 나는 노마골드를 다섯 개씩 먹곤 했다.(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설사를 했다.) 식탁 위에는 늘 빵이 놓여있었고, 집에서는 달큰한 고급 방향제 냄새가 은은했다. 마침 해도 잘 드는 집이어서 우리가 노트북을 두드리던 거실에는 주황색 햇빛이 길쭉하게 들어왔다.     


당시의 나는 타인의 취향이 나와 다를 수 있음을 그 친구로 인해 태어나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생생히 기억난다. 우유에 재티를 타고 있을 때였는데,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시험 잘 보면 엄마가 딸기 맛으로 사준대.”

당시의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엥? 초코 맛이 제일 맛있잖아.”

“나는 딸기 맛이 더 좋던데.”

“그래?”     


그래? 하고 말았지만 속으로는 전혀 납득하지 못했다. 딸기 맛이 더 좋다고? 어째서지. 초코 맛이 당연히 맛있는 거 아냐? 세상에는 딸기 맛을 초코 맛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꽤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영화를 볼 때도 그런 기분을 자주 느낀다. 나는 지금까지 총 1400편 정도의 영화를 보았는데, 그 중에서 최고의 영화를 하나만 꼽으라면 <그래비티>라고 답한다.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볼 때 한 번도 하지 못한 신기한 경험을 했다. 영화 시작부터 순식간에 몰입해서 감상하고 있었는데, 20-30분이 지나고 문득 엔딩크레딧이 올라온 것이다. 뜬금없이 영화가 끝나버렸다. 토렌트로 불법 다운로드를 해서 보던 것이라 파일을 잘 못 받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90분이 지난 것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라는 표현은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나는 정말 30분도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이후 영화를 5번 더 보았는데, 신기하게도 매번 90분이 지났다는 것은 실감할 수가 없었다. 영화는 길어야 한 시간 안에 끝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타인의 취향이라는 관점에서 <그래비티>의 리뷰나 평점 또한 놀라웠다. 맙소사. 이 영화를 지루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수면유도영화’라느니, ‘태어나 처음으로 영화보다 나왔다’느니, ‘너무너무 지루하고 노잼!’이라느니 하는 평가가 엄청나게 많았다. 딸기 맛이 초코 맛보다 맛있다고 말하던 친구를 볼 때처럼 내 세계가 흔들리고 가치관이 마구잡이로 충돌하는 기분이었다. ‘그럴 수 있지...’하며 이해해보려고 해도 ‘아니 그럴수 없억!!!! 도저히!!!’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나에게는 정답이 없는 취향에 정답을 주장하는 언어 습관이 있다. 시급히 고쳐야할 습관이면서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곤 한다. 그것 때문에 친구들하고 부딪힌 적도 많다. “넌 내가 좋다는데 왜 그게 틀렸대?” 친구는 어이없다는 듯 말하는데, 정작 나는 그렇게 말하는 친구 앞에서도 답답해했다. 논리적인 척 설명을 해댔지만 ‘그게 좋다는 게 말이 되냐?’ 식의 불통일뿐이었다. 타인의 취향이 나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나에게는 늘 어려웠던 것이다. 이제는 이를 알고 꽤나 신경 쓰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다.      


[이 노래는 좋은 거고. 그 영화는 구린 거고. 이 소설은 명작이고, 그 신발은 엉망이야. 그 가수는 가짜 창법이고, 이 가수 창법은 유니크하고. 그 감독은 허세고, 이 감독은 예술가야. 이건 편리하고, 저건 불편해. 저건 맞는 말이고, 이건 궤변이야.] 마음속에서는 당연히 좋은 것과 좋을 수 없는 것, 정확한 나의 취향과, 엉망인 타인의 취향을 가늠하느라 전쟁이 난다. 내가 타인의 혈관에 내 피를 들이 부어서 선지를 만들고 있는 줄도 모르고, 건방을 떠는 순간도 자꾸만 있다.       


‘취향이 다를 수 있음.’ 나에게는 영원히 어려운 문장이다. 취향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 나와 남이 다를 수 있다는 것. 완벽히 이해하면서도 나의 논리회로는 이렇게 자꾸 고장이 나버리고 만다. 딸기 맛이 초코 맛보다 맛있을 수 있다는 건 나도 안다. 그런데 어떻게 딸기 맛이 초코 맛보다 맛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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