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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an 12. 2021

무덤덤한 우울의 결

슬픈 장면이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절규하는 모습이 아니라, 지독한 슬픔 속에서 오히려 무덤덤한 자의 모습이다. 이를테면 엄마를 잃어 엉엉 우는 고아의 모습이 아니라, 엄마가 없어서 그렇게나 슬프면서도 무덤덤한 표정으로 웅크리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다.


“엄마 보고 싶어요?” 물을 때 “많이 보고 싶어요.”하는 것이 아니라 “괜찮아요.”하며 멋쩍게 시선을 피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 더더욱 눈물을 참기가 어려워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일본에서 실제 벌어진 아동 방치 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졌다. 엄마는 네 아이들을 무책임하게 버리고 떠나버렸고, 방치된 아이들은 최소한의 물과 식량도 없이 살아간다. 버려진 아이들을 중심으로 2시간이 넘게 이어지는 슬프지만 따뜻한 이야기다.     


영화에서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은 첫째 아키라다. 동생들을 돌보려고 노력하는 이 소년은 12살에 불과하지만, 능력 이상의 일을 해낸다. 어떻게든 먹을 것을 구하려고 도둑질도 감행한다.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참을 수 없는 침울함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 슬픔을 만드는 것은 첫째 아키라의 무덤덤함이다. 천진한 아이들의 모습과 절대 울지 않는 아키라의 얼굴을 보면 내가 대신 왈칵 울어주고 싶어 진다. 울어야 할 아이들이 울지 않는 게 어찌나 마음 아프던지.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프랭키 던(클린트 이스트우드)도 울지 않는다. 자신의 혈육과 같이 생각했던 제자가 불구가 되고, 그녀를 안락사시키는 와중에도. 그의 눈에 고인 눈물은 끝내 떨어지지 않는다. 눈 감은 제자에게 무덤덤한 자세로 키스를 하고, 뒷모습을 보이며 차분히 걸어 나간다.     


유튜브에서는 1983년 KBS에서 방영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볼 수 있다. 많은 가족들이 생이별을 했다가 다시 만나면서 오열하지만 그 가운데는 울지도 않고 덤덤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제 헤어지지 말자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하는 형제를 보면서 결국 울어버렸다.      


극복이 불가능한 감정을 억지로 이겨내려는 그 노력이야말로 진짜 슬픈 것이라고, 나는 자주 생각한다. 그런 슬픔의 장면들을 헤아리게 되는 것은 아마도 그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슬플 때 무덤덤해하는 것 또한 우리 집안의 내력이니까. 아버지가 우는 모습은 기억나지 않는다. 한두 번 보았을까. 그마저도 엉엉 우는 모습이 아니었다. 형도 힘들다는 말은 병적으로 참는다. ‘괜찮아.’ 언제나 ‘괜찮아’다. 어머니의 눈물은 이제야 조금 많아졌지만, 언제나 쉽게 우는 분이 아니셨다. 나도 그렇다. 누구에게나 쉽게 나약함을 드러내지 않고, 슬프면 어떻게든 혼자가 된다.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고 슬퍼하는 맛을 안다.     


무덤덤한 우울의 결을 어루만질 때면 그게 나와 같아서 마음이 더 아린다. ‘너 안 괜찮잖아.’ ‘그럴 때 나도 안 괜찮았거든.’ 혼자 되뇐다. 무덤덤하게 슬퍼하고, 무덤덤한 사람들 보면서 슬퍼한다. 감정도 습관이지 싶다. 신파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글이 자꾸만 감성적으로 흐른다. 나는 글도 무덤덤하게 쓰고 싶다. 그만 적는 게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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