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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an 15. 2021

트럭 뒤에 타고 싶었어

1. 트럭 뒤에 타는 게 어린 시절의 꿈이었다.      


2. 아버지의 봉고차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감각들.     

 

3. 두꺼운 지도책, 형광색 라이터, 조수석에 앉은 엄마의 옆모습, 특유의 답답한 냄새가 났던 시트. 그 시트의 질감, 항상 삐딱하게 앉느라 뻐근했던 목과 어깨, 옆으로 열리는 문, 무겁게 미끄러지며 닫힐 때의 살벌한 소리, 문 닫힐 때마다 했던 손가락이나 팔이 끼이는 상상, 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심하게 덜컹거리던 차창, 바닥의 쓰레기들, 운전석 바닥의 매트, 이따금 휴게소에서 매트를 꺼내 탈탈 털던 아버지의 모습과, 그의 담배 냄새, 머리 아픈 히터 냄새, 뽀익 뽀익 와이퍼의 움직임과, 와이퍼가 지 않아 삼각형으로 물자국이 남던 앞 유리창의 중간 부분…     


4. 아빠 차는 ‘봉고’인데 왜 '그레이스'라고 써 있어요? 차 이름은 그레이스인데, 이런 차를 보통 봉고라고 불러. 명절에 친척들과 나들이를 갈 때면 아빠 차에 엄청나게 많이 탈 수 있어서, 대가족을 이끌고 운전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멋있어 보였고    


5. 봉고차에 타서 창밖을 바라보면 언제나 트럭이 눈으로 들어왔다. 흰 트럭, 파란 트럭, 회색 트럭, 큰 트럭, 작은 트럭, 트럭에 트럭을 싣고 가는 모습, 길쭉하고 큰 트럭에 승용차들이 줄줄이 실려 있는 모습, 나는 흔하게 볼 수 있는 흰색이나 파란색 트럭의 짐칸을 보면서, 고속도로를 달리는 트럭의 짐칸을 보면서    

 

6. 그 위에 요를 깔고, 베개를 베고 누워 이불을 덮고, 찬 바람을 맞으면서 고속도로를 달리고 싶었다. 일정한 속도로 차가 달리는 한, 위험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눕거나 앉아서 갈 예정이었으므로 사고가 날 리 없었다. 한 번은 엄마에게 얘기를 했었는데 그럴 일도 없겠지만, 그렇게 탄다고 해도 무척이나 위험할거라고 하셨다.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7. 아버지의 사업이 여러 번 망하고나서 우리 집은 트럭을 갖게 되었다. 아버지가 과일 장사를 시작하셨기 때문인데 그 때문에 명절에는 봉고차 대신 트럭을 타고 내려가게 되었다. 그나마 체구가 작은 내가 가운데에 앉고 형은 조수석에 앉았다. 시댁과 사이가 안 좋았던 어머니는 어느새 부터 서울에 남았다. “짐칸에 타고 싶어요.” 아버지는 농담인 줄 아셨는지 별 대꾸도 안하셨다. 벌써 중학생이 되었기 때문에, 철없는 소리를 여러 번 할 수는 없었다.  

   

8. 트럭 짐칸에 요를 깔고, 베개를 베고, 이불을 덮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상상은 트럭의 앞자리에서 했다. 와이퍼가 뽀도독 하면서 움직였고, 닫지 않는 앞 유리창의 가운데, 아래쪽 부분에는 삼각형의 물 자국이 남았다. "형. 저거 너무 거슬려." "나도." 빈 곳 없이 깨끗이 닦이는 와이퍼의 모양을 상상했다.


9. 트럭의 뒤에 타게 된 것은 입대하고 나서였다. 자대 배치를 받고 일주일 쯤 되었을까, 김정일이 사망했고, 전군이 비상이었다. 전시 상황을 대비하여, 매일 아침마다 탄약고에서 탄을 꺼내고, 배분하고, 각자의 위치로 달려가는 훈련이 계속 되었다. 군부대 안에서 군용트럭을 타고 뱅뱅 돌아다녔다. 나는 그게 너무 재밌었다. 지하철 타듯이 트럭 뒤에 앉아서 바람을 맞으며 달리니 상쾌했다.      


10. 자주 타니 흥미를 잃었다. 해안 GOP와 내륙에 있는 부대를 수없이 왕복했다. 군용트럭 짐칸에만 타면 졸렸다. 찬바람이 부는데 서로 다닥다닥 붙어서 체온을 나누고 있으니, 딱 잠 올 만큼 포근해서 자꾸만 꾸벅꾸벅 졸았다. 졸다 걸리면 심하게 혼이 났고, 혼이 나면서도 잠을 이기기 쉽지 않았다. 너 부대 들어가서 보자. 선임이 죽일듯한 눈빛으로 엄포를 놨고, 아 좆됐다. 생각하면서도 눈은 감겼다.     


11. 트럭 짐칸에 타고 싶다는 생각은 사라졌다. 트럭 뒤에 타보기도 했고, 타보니까 그렇게 신이 나지도 않았다. 짐칸에 누워있으면 얼마나 덜컹일까. 이불 덮고 눕는다고 해도 전혀 편하지 않을 거고. 또 얼마나 위험한가. ‘좋은 차 뒷자리에 타고 싶다.’ ‘누가 운전을 해주면 좋겠다.’ 뻔하고 심심하지만 정확할 것이 분명한 욕망이 생겼다.      


12. 가끔 바라던 것이 영영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소한 꿈이 현실의 영역으로 내려오고, 그걸 또 어설프게 알게 되고, 결국 깨지는 일은 서글프다. 피천득은 자신의 수필집 『인연』에서, 아사코를 세 번 만났고, 세 번째는 아니 만나는 게 좋았을 거라고 말했다. 나의 경우에도 영영 트럭 짐칸에는 타보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그 덜컹임과, 싸늘함을 모르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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