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댐 Jan 06. 2021

지하철을 멈춰 세울 수 없듯이

-진부한 시간 이야기

영화 속 쫓기는 남자가 지하철에 가까스로 타는 장면을 좋아합니다. 문이 아슬아슬하게 닫히면, 지하철은 급할 것 하나 없는 자세로 출발하고 추격자는 망연자실 유리창 안 쪽을 응시합니다. 무겁게 미끄러지는 차량은 금세 속도를 붙이며 깜깜한 터널 속으로 사라집니다.     


지하철을 멈춰 세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차량마다 긴급제동장치가 있기는 하지만,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작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작동하려해도 비상의 비상순간에야 시도해볼 수 있는 것이지, 단순히 열차를 멈추고 싶다는 이유는 아니겠지요. 한 번 출발하기 시작한 지하철은 불가항력이고, 지하철의 신뢰도는 거기에서 옵니다.     


저는 버스보다 지하철을 좋아합니다. 변수를 만들지 않는 그 일정함이 좋습니다. 창밖이 컴컴할 뿐이라서 답답하다는 사람들도 많지만 모두가 스마트폰을 소지하고 있는 세상에서 그런 단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하철은 늘 빠르고, 안전하고, 정확하게 움직입니다. 순서대로 착착착. 한 번 출발하면 멈추지 않는다. 그게 지하철의 속성이 아닐까요.     


대통령이라도 지하철을 멈춰 세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3분이면 다음 열차가 올 테니까, 막 출발하려는 그 육중한 열차를 굳이 후진시킬 필요는 없죠. 지하철 후진하는 거 본 적 있으십니까. 조금 뜬금없기는 한데, 저는 지하철의 후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플랫폼에서 본 것도 아니고, 후진하는 지하철 안에 타 있었죠. 3호선 무악재역 근처에 살 때였는데, 막 독립문역을 지나 무악재역에 진입하려는 찰나였습니다. 깜깜하던 터널을 벗어나 플랫폼에 들어서면서 창밖은 환해졌고, 열차의 속도는 서서히 줄어들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완만하게 줄어들다가 멈춰야 했는데, 느리지만 부드러운 속도를 유지하며 무악재역을 통과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엥? 열차는 다시 캄캄한 터널로 들어가버렸습니다.      


곧 속도가 줄어들더니 기차가 멈추더군요. 방송이 나왔습니다. 죄송하다, 후진하겠다. 그런 얘기였던 것 같습니다. 지하철은 다시 뒤로 움직였고, 플랫폼에 멈춰 섰습니다. 문이 열렸습니다. 저는 내렸고, 참 별일도 다 있구나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험한 지하철의 후진이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간발의 차로 지하철을 놓쳤습니다. 수서행 타면 출근길에 좀 널럴하게 갈 수 있는데요, 눈앞에서 막 문이 닫혀서 다음 오금행 열차를 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이 어찌나 많던지, 앉는 것은 고사하고 손잡이라도 잡고 싶더군요. 아무튼 눈앞에서 놓쳐버린 수서행 지하철은 자신의 페이스로 서서히, 아주 느리게 가속하며 떠났습니다. 바로 내 눈앞에 있었는데… 멈추는 것까지는 아니라도 문만 열어주면 가볍게 뛰어서 올라탈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냥 그렇게 떠나갔습니다.     


그 여유 있는 가속도가 새삼스럽게 얄미웠던 기억입니다. 그러고 보면 2020년이 그렇게 떠난 지하철 같습니다. 문 닫고 천천히 떠나가는데 다시 올라탈 수는 없는 지하철. 눈앞에 있어서 하루 이틀만 거슬러 가면 될 것 같은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죠. 그냥 그 속도로 멀어져 갑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일렬로 달리는 지하철들은 순서대로 출발하잖아요. 앞차와 뒤차는 가까운 거리로 운행하지만 영영 만날 수는 없지요. 2020년과 2021년이, 2021년과 2022년이, 줄줄이 이어진 지하철 같습니다. 저는 2020년에서 내려서 2021년으로 갈아탔고, 2020년은 저만치 미끄러져 갑니다. 이렇게 갈아타다보면, 어느 순간에는 지하철역 바깥으로 나갈 날도 오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새해에는 오로지 건강을 기원하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