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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Mar 17. 2021

사랑의 비루함

내가 사랑하는 영화들

지금이야 드라마들 수준이 엄청나게 올라갔지만, 내가 어렸을 때 가족들과 모여 보던 드라마들은 내용이 거의 다 비슷비슷했다. 능력 있지만 어딘가 결함이 있는 남자와, 불우하지만 이상적인 성격을 가진 여자가 만나 갈등을 사랑으로 극복하며 끝맺는 이야기들. 모두 보고 나면 역시 재밌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어딘가 흔쾌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미디어를 통해 접했던 사랑들은 모두 물리학적 사랑이었다. 물리학 실험처럼 완벽히 통제된 상황에서만 변수 없이 작동하는 그런 완전무결한 사랑. 그런 사랑은 현실의 사랑과 무척이나 닮아있지만, 결정적인 지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드러냈다. 현실적인 사랑에서는 인과관계가 뚜렷하지 않은 갈등도 있고, 해결되지 않는 갈등도 있고, 기승전결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 지저분하고 추한 모습도 언제나 동반하고 있다. 한정된 시간 안에 다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만 드라마에는 그런 사랑의 비루함이 빠져있곤 했다.

<우리도 사랑일까> 같은 영화를 보면 안타깝다. 주인공 마고에게는 자상하고 유머러스한 남편이 있는데(요리까지 잘한다) 우연히 옆집으로 이사 온 남자 대니얼에게 흔들린다. 영화를 보는 누구라도, 그 여자의 흔들리는 감정이 위험하고, 어리석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마고는 대니얼을 택한다. '루 같은 남자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분명 후회한다 너.' 혼자서 중얼거리게 된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가슴 한 구석에는 내가 언젠가 느꼈던 새로운 사람에 대한 흥미와, 설레는 감정이 떠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아노말리사>는 어떤가. 권태로운 일상에서 무심하게 살아가는 마이클 스톤이 수줍은 여자 ‘리사’에게 홀딱 반하고 같이 밤을 보내는데, 아침이 돼서 밥을 먹을 때가 되어서는 그녀의 쩝쩝대는 소리가 거슬리기 시작한다.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 구제할 수 없는 그의 한심함에 비참해질 정도가 되는데, 한 편으로는 나도 그렇게 누군가에게 흠뻑 빠졌다가 단점을 발견해나가는 사람일 때가 많았다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단란하고 평범한 부부 에이프릴과 프랭크의 낭만적인 약속으로 시작해서 파멸로 끝이 난다. 둘은 모든 것을 버리고 파리로 이민 가자는 목표를 세우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랭크는 승진을 제의받고, 에이프릴은 임신을 한다. '하필이면'이라는 단어는 우리 인생에서 시시때때로 나타나 발을 거는 법이다. 현실과 이상 앞에서 안전한 현실을 택할 것인가, 불안한 이상을 택할 것인가. 안타깝지만 대체로 우리는 안전한 현실을 택하는 사람들이고, 영화 속 두 인물도 마찬가지다. 살아가면서 '하필이면'이라는 단어를 만나고, 현실적인 선택을 하면서 망가지는 꿈은 얼마나 많은가. 그것이 사랑에 관한 비극일 때, 결국 두 사람 모두가 서로에게 실망하게 되었던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게 된다. 안타까워진다.


이처럼 나는 사랑의 비루함을 다루는 영화들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막 질하고, 하찮고, 사소하고, 한심하고, 추잡하고, 이기적이고, 골치 아픈 사랑 이야기를 보면 세상의 단면을 그대로 회로 떠서 접시에 올려놓은 것 같은 싱싱함이 느껴진다. 내가 겪었던 것과 정확히 같은 감정이, 레고 블록을 틈새 없이 끼우듯 맞추어지는 것 같다. 세련되고 깔끔하게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없는 나는  앞으로도 사랑의 비루함을 껴안고 우당탕탕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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