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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Aug 14. 2023

두 번째 유토피아는 어떻게 가능하다는 걸까

-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리뷰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잘 만든 영화 같다. 그러나 좋은 영화인지는 모르겠다. 흥미로운 설정, 신파 없이 세련된 전개, 어색함 없는 특수효과, 주연배우들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통해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부터 중간,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나는 연신 갸우뚱하기만 했다.


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얘기를 하기 전에 먼저 <타이타닉>을 떠올려 보자. 배가 침몰하고 있다. 구명보트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모두가 살 수는 없다. 참혹한 상황 속에서 승객들은 어떤 선택을 했나. 그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먼저 태우기로 한다. 승무원들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악단은 침몰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연주를 계속한다. 그래서 <타이타닉>의 그 장면에서는, 가슴속에 어떤 감동이 느껴진다.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숭고함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모두가 살 수 없다면 약자 먼저.’ ‘내가 가진 책무가 있다면 죽는 순간까지 지킴.’ 그것이 정답인지는 몰라도, 느낄 수 있었다.


<더 플랫폼>이나 <설국열차> 같은 영화를 떠올려 보자. 무언가 잘못된 시스템 속에서 약자들이 착취당하고 있다. 상생할 수 있는 길이 있어 보이는데, 공고한 시스템은 이기적이고, 잔인하게 돌아간다. 그 속에서 주인공은 어떤 선택을 하는가. 시스템을 무너뜨리기 위해 나선다. 대의를 위해 제 몸을 던진다. 성공인지 실패인지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 정확히 알 수 없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이 이야기들의 결말에는 나름의 희망이 불씨처럼 남아있다.


반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그 의도가 불분명해 보인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극한의 상황을 통해 이 사회를 은유하고 있는 건 알겠다. 현대 사회가 내포하는 문제, 부조리를 겨냥하고 있는 건 분명하다. 국제적으로는 난민 문제일 수도 있고, 조금 좁게 보면 다양한 방면에서의 갈등이나 계급의 문제, 양극화, 혐오의 정치, 집단 이기주의, 승자독식, 난공불락의 시스템일 수도 있다. 그 모든 것들은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과 연결된다. 그런데 단순히 그것을 전시하는 데 그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문제가 문제인 것을 우리가 모르나. 그 어떤 대안도 없이, “하하, 맞아. 우리가 저렇게 이기적이지.” “현대 사회가 참 문제가 많아.” “인간이라는 게 저렇게 비겁하고 추악해.” 하면서 극장을 나올 필요가 있을까. 감독은 우리가 자조하고 좌절하기를 바랐을까.


희망을 말하는 영화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만약 문을 활짝 열고 모두를 받아들이는 것이 정답이었다고 말하는 거라면,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것이라면 너무 순진한 생각 아닌가. 황궁 아파트에 모두를 들여서 오손도손 잘 살 수 있는 거였다면. ‘평범한’ 황궁 주민들은 왜 그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지속 가능한 방법이라면. 누가 악역을 택하고 싶을까. 한정된 식량과 공간, 기약 없는 악조건이 이야기의 전제 아니었나. 애초에 그 어떤 희망도, 탈출구도 제시하지 않았으면서 인간의 도덕성에 기대는 건 좀 비겁한 것 아닐까.


감독이 말하고 싶은 게 정말 포용과 협력의 정신이라면, 명화(박보영)가 마지막에 당도한 두 번째 유토피아는 어떻게 가능하다는 걸까. 왜 그들은 이방인을 환대하면서도, 따뜻한 보금자리와 식량을 유지할 수 있을까. 황궁 아파트의 사람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며 필사적으로 시스템을 구축했는데도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그들은 어떻게 울타리 하나 없이도 그렇게 이상적인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었나. 그것이 따뜻한 마음의 힘이라는 걸까.


시종일관 착한 척을 하는 명화(박보영)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혹시 의도적인 연출인가 싶기도 하다. 그러니까 현실적인 대안은 내놓지 못하면서도 착한 척은 하고 싶은, 일부의 위선을 꼬집고 싶었던 건가 싶기도 하다. 그게 아니라면 도무지 그녀의 행동은 납득할 수가 없다. 공고한 시스템 속에서 적당히 타협하면서도, 자기 손에 피를 묻히고 싶어 하지는 않는 모습. 공동체의 룰을 거스르고 혼자서 고고하다는 식으로 일관하는 태도. 자기가 직접 보지 못한 폭력 사태에는 경멸을 하면서도, 자신의 남편이 위험해 보이는 순간에는 지체 없이 인두로 타인의 몸을 지지는 행동.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참 난감해진다.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착해서 명화(박보영)는 살아남은 거라고, 그런 모습을 오히려 조롱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의도한 거라면 적어도 한 번쯤은 그녀가 자신의 이중적인 행동에 대해 흠칫하는 모습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자기만 착하다고, 자기가 맞았다고 진심으로 믿는 것 같다.


이 영화는 콘크리트로 구축된 이 현대사회에 희망이란 없다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어떤 방식으로든 유토피아라는 게 존재할 수 없다고 비관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영화가 왜 필요한가.


“제가 이래저래 많은 고민을 해보았는데, 이미 틀려 먹었습니다. 이 시스템이라는 것이… 답이 없더라구요. 그 어떤 방식으로도 해결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영화의 결말에 보이는 유토피아도 잠시 뿐. 언젠가는 지옥으로 변할 겁니다. 유토피아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뜻이잖아요."


이런 하나마나한 얘기를 하는 거라면 두 시간이나 할애해서 이 영화를 볼 필요가 없지 않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어떤 방식으로 해석해도, 의미를 찾기 힘든 것 같다. 이쪽을 막으면 저쪽이 터지고 저쪽을 막으면 이쪽이 터지는 기분이라서. 그냥 나는 갸우뚱할 뿐이었다. <타이타닉>이나 <더 플랫폼>, <설국열차>는 악조건을 제시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라면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고민하게 만들었다. 반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모든 길이 막혀있는 미로를 제시했다. 그 미로에서 절대 탈출할 수 없도록 해놓고, 허우적거린다고 비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재미있었지만, 박수를 칠 수는 없었다. 단순한 희망에 내 마음을 의탁하고 싶지도 않고, 대안 없는 냉소에 좌절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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