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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un 15. 2023

<플래시> 재미는 있고 감동은 없는

그만 되돌리자

세상에는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영화들이 널려있는가 하면, 재미와 감동을 모두 취한 영화들도 있다. 얼마 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는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는 훌륭한 오락영화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새로 개봉한 DC의 야심작 <플래시>는 어떨까. 굳이 분류해야 한다면 '재미는 있지만 감동은 없는 영화'라고 부르고 싶다. (당연히 주관적인 평가일 것이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솔직히 <플래시>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미 우리가 셀 수 없이 반복해서 보아온 이야기 아닌가. 이미 수십 년 전 <백투더퓨처>가 있었고(무려 세편이나!), 최근에는 <어바웃 타임> 같은 걸출한 영화를 통해서도 반복되었다. <타임패러독스>, <시간여행자의 아내>, <이프온리> 같은 영화들도 사실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결은 조금 다르지만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하여 과거와 미래를 가능성의 차원에서 바라본 <미스터 노바디>와 같은 영화도 있었다. 이 영화들은 과거나 미래를 수없이 조립하면서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무거운 것인지를 역설했다. 나는 이런 류의 이야기를 아주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려서 과거를 바로잡고 미래를 바꾸려고 하는 이야기는 이제 낡을 대로 낡았다는 생각이다. 선형적 시간여행을 멀티버스로 확장한들, 결국 같은 얘기다. 아무리 원작이 있다지만, 나라면 좀 더 참신한 무언가를 강구했을 것 같다.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서 상호작용하고. 본의 아니게 상황을 악화시키고, '과거를 바로잡는 최선의 방법은 아무것도 바로잡지 않는 것'이라는 교훈을 얻는 이야기는... 솔직히 진부할 따름이다. 


그런데 <플래시>의 주인공 '플래시'는 그 난리를 겪고도 마지막까지 정신을 못 차리기까지 했다. 과거를 조작해서 미래를 바꾸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죽음의 문턱까지 가서 실감하고도, 토마토캔 위치를 바꾼다는 게 가당키나 한지 모르겠다. 알콜중독으로 패가망신한 남자가 큰 깨달음을 얻고 저도수의 막걸리로 주종을 바꾸기로 했다면. 그건 비웃음거리에 불과하지 않나. 이 엔딩이 속편을 위한 빌드업이라면, 그것대로 조금 난처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래시>는 혹평의 대상은 아닌 것 같다. 시간여행의 진부함은 오로지 나의 주관적 취향일 뿐, 영화 자체는 흠잡을 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영리하기까지 했다. 플래시의 미친 속도감을 제대로 구현해 냈다고 생각한다. 스토리도 매끈하고, 주인공이 설득력 있게 성장하는 모습도 좋았다. 에즈라 밀러의 1인 2역 연기 또한 나무랄 데가 없었다. 호쾌한 액션은 웬만한 히어로물 이상이었다.


DC스튜디오가 팬서비스에 얼마나 진심인지도 알 수 있었다. 또 다른 우주의 문을 활짝 열고, 지나간 옛 영웅들을 초대하고, 제작이 무산된 주인공까지 보여주는 모습에는 진정성이 넘쳐흘렀다. (어쩌면 DC는 진부함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감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이클 키튼은 마블과 DC를 정말 박쥐처럼 옮겨 다니며, 평생 버드맨으로 살아갈 팔자인가 싶어서 뜬금없이 웃음이 터지기도 했는데, 아무튼 이번 <플래시>는 참 성의 있게 만든 영화임에 틀림없다.


주인공 '플래시'가 자신의 초능력을 이용해 과거로 되돌아가 미래를 바로 잡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DC스튜디오 또한 플래시를 이용해 망가진 저스티스 리그를 바로 잡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플래시의 초능력이 가공할 속도라면, DC스튜디오의 초능력은 이제 '플래시'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끝으로 에즈라 밀러가 좀 인간답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의 외모나 연기, 커리어 모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데 현실에서의 횡보가 너무하다. 예술하는 예술가에게 도덕적이기까지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조금 어불성설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선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플래시'도 '에즈라 밀러'도 (그리고 나도) 과거를 바로 잡을 수는 없지만 미래를 잘 살아갈 수는 있다고 믿는다. 

출처: <플래시>(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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