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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May 20. 2023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성난 사람들(BEEF)》리뷰

넷플릭스 역사상 최고의 드라마고, 아마 이번 에미상을 휩쓸 것 같아

(스포일러 없음)


몇 주 전, 가까운 지인이 나에게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BEEF)>을 꼭 보라면서 덧붙이는 말이었다. 유난이 아닌가 싶었지만 괜히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정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BEEF>는 아주 작은 싸움이 걷잡을 수 없이 큰 싸움으로 번지는 이야기다. 별것 아닌 일로 불편한 감정이 생기고, 시비가 붙고, 서로를 위협하고, 이는 서로에게 모멸감으로 남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복수를 하는데 정작 망가지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무언가 바로잡으려 할수록 일은 점점 악화하고, 소득 없이 자꾸만 소중한 것들을 잃게 된다. 분노는 분노를 낳고 복수는 복수를 낳는데 남는 것은 하나도 없다.


현대인은 왜 분노하는가. 최근 몇 년 간 이 분노에 대해서 여러 번 생각하고, 또 글로 쓴 적이 있다. 하나 예를 들어볼까. 무명 가수가 하루아침에 유튜브나 커뮤니티를 통해서 재조명된다. 무명 가수는 연예계를 등지고 충실한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아저씨다.


"다시 돌아와서 내 취향을 증명해!" 대중은 그의 행적을 추적하고 천재가 초야에 묻혀있다며 호들갑을 떨어댄다. 방송국은 이를 놓치지 않고 그를 섭외하고, 갖은 스토리텔링을 통해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알린다. 그런데 그가 성공적으로 복귀해서 콘서트를 하고 광고를 찍기 시작하면, 이제 대중이 원하는 것은 해피 엔딩이 아니다. 그들은 이제 그의 추락을 위해 매진한다. 그의 언행, 사소한 행동을 검열하고 해석하기 시작한다. 그의 과거 병역문제, 이성문제 등을 훑는가 하면, 많은 돈을 벌고도 기부하지 않는다며 욕하기도 한다. 강제로 소환된 그는 강제로 퇴출되고 만다. 떨어지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


잘 나가는 연예인, 유튜버, 공직자에게도 이런 룰은 비슷하게 적용된다. 올라갈 땐 계단을 밟고 한 칸씩 올라가지만 내려갈 때는 미끄럼틀을 타고 간다. 단 하나의 사건으로 영원히 스타가 될 수는 없지만 단 하나의 결점, 실수로는 영원히 파멸할 수 있다.


대중의 추악함을 구태여 들추자는 게 아니다. 인간은 욕망과 합리에 따라 행동할 뿐, 이것은 오로지 시스템의 문제다. 행복도 지수 1위로 유명했던 국가 '부탄'은 국민의 행복을 위한 정책까지 별도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로 국민 행복에 진심이지만 나날이 그 만족도가 추락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현상은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잘 사는지 알게 된 이후 시작되었다는데. 기준선이 위로 그어지면, 상대적으로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거다.


현대 사회의 문제는 행복의 기준선이 너무 높고 많다는 데에 있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그 기준선을 충족할 수가 없다. 돈, 얼굴, 이성 교제, 직장, 명예, 학벌, 자녀, 거주 지역, 집... 이밖에도 기준선의 수가 셀 수 없이 많은데, 한참 위에 그어져 있다. 여러 미디어를 통해 서로가 너무 잘 보인다. 타인의 잘 사는 모습은 망원경으로 보이고, 나의 결점은 현미경으로 보인다. 여기서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인가.


모두가 결핍과 트라우마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 뒤틀린 사회 속에서 우리는 왜 화나있는지도 모른 채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 원인 모를 두려움과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 노력하고, 그게 안되니까 서로에게 분노하고, 우상의 뒤꽁무니만 쫓다가 소중한 걸 다 망쳐버린다.


<BEEF>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모든 인물들의 욕망과 결핍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이다. 모두 설득력 있게 화나있다. 모두 한심하지만, 어느 정도 나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해가 된다. 할리우드 작법에 의해 정직하게 흐르지도 않는다. 예측불허의 사건이 이어지고, 특히 마지막 화에 이르러서는... 정말 감탄을 자아낸다. 이동진 평론가가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의 한줄평으로 '티끌로 만든 태산'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이 작품이야 말로 티끌로 빚어낸 태산 같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BEEF>는 나름대로의 답을 준다. 엄청나게 새로운 깨달음은 아니고, 결국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 측은해하는 것, 사랑하는 것이 가장 저렴하고 확실한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부정할 수 없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로 행복해지는 경우는 없으니까. 증오를 통해 상대방을 나와 같이 추락시킬 수는 있지만, 내가 날아오르는 길이 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맞는 말이다.


잘 모르겠다. 그게 가능하다면, 왜 우리는 여전히 여기서 분노하고 자책할까. '만인의 만인에 대한 사랑'이라는 게 성립할 수 있을까. 사랑보다 증오가 쉬운 것처럼, 변화보다 냉소가 쉬워서 나는 이렇게 회의적일까.


아무튼 <BEEF>를 추천한다. 이 드라마 속 어딘가에는 분명히 내가 있다. 당신도 욕망과 결핍으로 가득한 부끄러운 당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살면서 언젠가 만났던, 보았던 얄미운 그런 악인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사람들을 한심해하고 분노하면서 이 이야기를 따라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두가 안쓰럽고 불쌍해 보일 것이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자기 자신을 한번 꼭 안아주고 싶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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