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령보다 강력한 이야기의 힘
군대에서 만난 인생의 스승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남중사님은 특별했다. 책 한 권 읽지 않으면서도, 타고난 감각으로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을 구사하는 분이셨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분의 언어를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일병 무렵이었나, 야간 점호 시간 분위기가 살벌했다. 선임들이 도대체 후임들에게 관심이 없다며 남중사님이 단단히 화가 나신 거였다. 다음날 첫 휴가를 나가는 이등병 막내가 있었는데, 휴가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아직 짐을 싸지도 않았고, A급 군복을 빌려준다거나 하는 어떤 챙김도 없었던 것이다.
짐을 대신 싸준다든가, 칼각으로 옷을 다려주지는 못하더라도, 군화 정도는 광이 반짝반짝 나게 닦아줄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였다. 하지만 남중사님은 강압적인 지시로 목적을 달성하는 분이 아니셨다.
"나 병사 생활할 때, 이등병이 첫 휴가 나가기 전 날이면, 선임들이 후임 청소도 안 시키고 얼굴에 화장품 막 발라준다고. 그리고 일찍 재운다고. 후임 잠들면 맞선임 두 명이서, 군화 한 짝씩 들고 화장실로 들어간다고. 간부가 뭐라 하건 말건 눈치 봐가면서 30분씩 구두약에 불붙여서 불광 내준다고, 먼지 한 톨 안 묻게 손수건으로 덮어주고 그제서야 잔다고."
‘~라고.’, ‘~다고.’로 끝나는 특유의 말투로 이렇게 이야기를 툭. 던지시고는 점호를 마무리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를 듣고 나면 신기하게도 뭔가 가슴속으로 뜨거운 것이 차오르는 듯했다.
“자라.”
남중사님은 무뚝뚝한 자세로 생활관을 나가셨고 그렇게 점호가 끝나면, 감화된 표정의 선임들은 막내의 군화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다음날 그 막내는 반짝반짝 불광을 낸 전투화를 신고 위병소를 나설 수 있었다.
훈련에서 우리가 판 참호가 엉망이었을 때도, 남중사님은 호를 똑바로 파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가 어느 훈련에서 팠던 참호의 모습과, 그것을 파는데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얼마나 위장이 철저했고, 상대편의 침투를 효과적으로 막아냈는지를 설명할 뿐이었다.
계단식으로 호를 파서 앉기 편하도록 만들고, 판초우의를 덮어 나뭇가지와 풀들로 위장하는 과정을 디테일하게 설명해 주셨다. 내가 그렇게 했으니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지만, 그 설명을 듣고 있으면 누구나 그렇게 땅을 파고 진지를 위장하고 싶어졌다.
경계초소에서 수하를 똑바로 하라고 말한적도 없었다. 자기가 하사였던 시절,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얼마나 철저하게 신원을 확인했는지, 어떤 자세로 소대원들과 즉각조치 시뮬레이션을 했는지를 들려줄 뿐이었다. 근무를 똑바로 서고, 신원확인을 철저히 하라고 말하지 않으셨지만, 그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저절로 그렇게 하고 싶어졌다.
군생활 내내 남중사님은 스토리텔링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아마 지금도 같은 방식으로 부하들을 독려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스토리텔링은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움직이는 모든 일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때의 나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지금에 와서야 어렴풋이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