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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댐 Jul 19. 2017

흐린 날, 용띠는 나가지 마세요

- 우리 외할머니 이야기.

그저께 외할머니가 잠깐 서울에 올라오셨다가 하루 이틀 머무시고 내려가셨다.

외할머니는 창원 출신으로 자식들을 모두 시집장가 보낸 이후로도 한참이나 그곳에서 사시다가 밀양으로 거처를 옮기신지 십년정도가 되셨다.


밀양이 워낙 더운 곳이라 여름에 내려갈 일이 있으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한다. KTX에서 내리자마자부터 호흡기를 턱! 치는 그 습한 열기에 나는 결코 적응되지 않는다.


서울에 올라오신 외할머니는 서울이 참 시원하다시며 감탄의 말을 내뱉었다. 사실 날씨가 좀 흐려서 평소보다 선선하기는 했다.


일흔 여덟의 우리 외할머니는 초등학교도 다니신 바 없어 글조차 모르신다. 한글도 육십이 넘을 때까지 모르셨다가, 이후에 조금 배워 간단한 글자를 막 쓰신다. 맞춤법은 엉망이라도 나는 그 글 씨를 볼때마다 좋아한다.


쓰는 글에 익숙하지 않으실 뿐이지 언변은 참 뛰어나신데, 국어전공자인 나보다 어휘력이 풍부하신 것 같다.

타고난 재간에 경상도식 표현이 한데 섞여 독특한 언어세계를 가지고 있다.


나는 들을 때마다 감탄해 마지 않지만 어머니 말로는 경상도에서는 흔한 화법이라신다.


날씨가 흐린데 자꾸 밖으로 나가서 점심을 사먹자하는 말이 마음에 안드셨는지 자꾸 핑계를 대신다.


- 내사 용띠라 흐린날 나가면 비온다. 느이들 나가 먹고 오니라


이런 문학적인 거절 방법이라니. 어머니와 나는 눈을 마주치고 익살스럽게 웃었다.


용이 비 바람을 몰고다니는 영물이라도, 그게 용띠에게도 해당될리가. 세상에 용띠가 얼마나 많은데.


할머니는 죽음도 색다르게 표현하신다.

언젠가 한번은 오래살아봐야 추하다시며 일찍 가는게 낫다는 말씀을 이렇게 하셨었다.


- 자는 잠에 열반해야 되는데 오래 살아 무할꼬.


자는 잠에(자는 도중에) 열반의 경지에 올라야 하는데(죽어야 하는데)

죽음을 열반의 경지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을 미처 못했었는데. 살면서 책 한권 읽어보지 않은 할머니 입에서 저런 표현이 하루에도 수십번 씩 쏟아진다.


어제 퇴근하고 돌아오니 삼촌과 다시 밀양으로 내려가셨다. 매사 열심히 하라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하시는 할머니와는 고작 밥 두끼를 먹었다. 말은 몇 마디를 나누지 못했다.


어느새 내가 알던 모습보다 한참이나 늙어버린 할머니를 보면서 짠하게 안타깝다. 무뚝뚝한 서울 손자는 여전히 살갑게 대하지 못하는 점이 죄송하고. 그래서 한마디 한마디가 애쓰지 않아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아쉬운 마음에 아무렇게나 글을 적어본다. 글 쓸 시간에 전화 한 통이 더 나으련만 어쩐지 참 쑥스럽다.


앞으로 흐린 날이면 내리는 비를 보면서

용띠가 괜히 밖을 돌아다녀 그런가보다. 그런 생각이 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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