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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덕준 Oct 12. 2016

아카시아와 여덟 살의 엽서

서덕준




블라인드의 덧니 사이로 빛이 지저귑니다. 오후가 보낸 엽서예요. 한번 열어볼까요?
동봉된 빛에는 석곡동 개여울을 유랑하는 소리들이 발을 담그고 있습니다. 엽서의 첫 줄에서는 네발 자전거가 삐걱거려요. 맨발의 여덟 살 아이가 아카시아 잎을 세어요. 연녹색 베개 위에 아이를 눕히고 책을 읽어주는 여자가 있고 광대뼈가 도드라진 사내는 새로 짠 액자 틀에 삶을 청구하고 있습니다. 엽서의 두 번째 구절에는 도라지꽃처럼 잉크가 번져 있고 나는 그 보랏빛 우물에 잠시 뺨을 대어 봅니다. 바람이 지나간 활자마다 어린 사슴이 뛰어다녀요. 제비 색이 잘 어울리는 여자는 다음 문장에 그어진 밑줄 위로 흰 명주 이불을 널고 있습니다. 그 여자는 채도가 낮아졌을 뿐 달라진 건 없습니다. 물결친 문장의 강변으로 어느 사내의 일기장이 떠밀려 옵니다. 개여울에 사금이 빛나고 녹음된 파도 소리가 문장의 마침표를 찍어요. 보내는 날짜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숫자마다 토끼풀이 자랍니다. 엽서의 귀퉁이로 네발 자전거가 돌아 나가요. 보내는 이의 이름 옆으로 여덟 살 아이가 맨발로 달려오고 아카시아 잎을 내려놓아요. 우리 다음에 꼭 만나자고.
그늘이 찾아듭니다. 엽서를 이제 놓아줄 시간이에요. 블라인드 밖으로 빛이 도망합니다. 손금을 원고지 삼아 답장을 해요. 그늘이 페이드 아웃되길 기다립니다.
햇살이 이번 답장을 여덟 살의 나에게 데려다 줄 때까지.  




/ 서덕준, 아카시아와 여덟 살의 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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