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무력의 법칙
'중도(中道)'는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덕목으로,
치우치지 않은 바른 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유무력의 법칙을 통해서
'중도'와 관련하여 우리 인생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고,
우리가 어떤 길을 가면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석가모니는 출가 전 물질적으로 풍족한 왕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풍족하고 즐거운 삶(낙행, 樂行)을 통해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고행(신체에 고통을 줌, 苦行)의 도를 닦기 위해 출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행 또한 몸을 괴롭게 할 뿐 인생의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결과 '고'와 '낙'을 떠나 중도에 설 때 비로소 진실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도를 간단하게 표현하면 '양 극단의 중간 즈음', '치우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중도의 반대말은 '치우친 상태'가 됩니다.
중도 상태 <----> 치우친 상태
1. 유무력의 법칙은 중도를 말하는 법칙이다.
우리의 삶은 누구나 항상 중도 상태를 향해 나아가는 중입니다.
유무력의 법칙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무력의 법칙에 의해,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내가 불행함을 깨닫게 됩니다.
반대로,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내가 행복함을 깨닫게 됩니다.
행복하다고 생각할 때 불행함을 깨닫게 되고,
불행하다고 생각할 때 행복함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행복하다는 생각도, 불행하다는 생각도 서서히 사라지게 됩니다.
파동의 형태로 보면,
진폭(높낮이)이 큰 상태에서 작은 상태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중도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상태를 말하고,
불교에서는 이를 '생각이 끊어졌다.'라고 표현합니다.
행복하다는 생각도 불행하다는 생각도 없는 이 상태를
불교에서 '영원한 행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영원한 행복'은 행복의 감정이 영원히 느껴진다는 뜻이 아니고
강하게 행복하다는 느낌도 없고, 강하게 불행하다는 느낌도 없는 '중도 상태'를 말합니다.
이 우주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 항상 반대의 상태가 현실화됨으로써
자신의 인생에 대한 어떤 깨달음(생각)도 고정될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유무력의 법칙에 의한 < 반야심경 >의 해석'이라는 글에서 말씀드렸듯이
불교의 대표 경전 중 하나인 반야심경도
이 우주에 고정된 실체는 없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뒤로 넘어졌는데 앞에 있는 코가 어떻게 깨져.'라는 고정된 생각을 갖고 있을 때
우주는 나에게 뒤로 넘어져서 코가 깨지는 상황이 발생시켜
'뒤로 넘어지면 앞에 있는 코가 깨질 수 없다.'라는 고정된 생각을 무참히 깨버립니다.
고정된 생각이 깨져 사라짐으로써 서서히 중도 상태가 되도록 만듭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 우주는 어떤 사람이 갖고 있는 고정된 생각을 깨는 상황을 그 사람에게 나타나도록 만듦으로써
고정된 생각을 없애버리고 중도 상태를 향해 가도록 이끕니다.
2. 유무력의 법칙 또한 중도 상태에 있다.
유무력의 법칙에 의해,
유무력의 법칙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유무력의 법칙이 틀리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반대로,
유무력의 법칙이 틀리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유무력의 법칙이 맞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시크릿을 찾는 유무력의 법칙』 파트3의 6장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유무력의 법칙을 발견(?)하고나서
유무력의 법칙이 맞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이 법칙은 잘못된 법칙인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법칙이 잘못된 법칙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이 법칙은 확실히 맞는 법칙인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생각이 요즘에도 번갈아가면서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결과 저는 '유무력의 법칙이 맞다.'라는 생각도, '유무력의 법칙이 틀리다.'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되어갑니다.
'유무력의 법칙이 맞다. 또는 틀리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중도의 상태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인간의 관점으로 살아갑니다.
인간의 관점으로 유무력의 법칙은
중도 상태에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는
이 세상이 항상 유무력의 법칙에 맞추어서 흘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의 관점으로 이 우주는 항상 유무력의 법칙에 맞추어서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관점으로 이 우주는 유무력의 법칙이 맞지도, 틀리지도 않는 상태가 되어갑니다.
3. 이 세상은 이미 항상 중도 상태이다.
우리의 인생은 항상 중도 상태를 향해 갑니다.
동시에 우리의 인생은 이미 항상 중도 상태입니다.
수학에서 0.999999999⋯ = 1 입니다.
1을 향해 무한대로 다가가고 있는 상태는 1과 정확히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중도 상태를 향해 무한대로 다가가고 있는 상태는
이미 중도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크릿을 찾는 유무력의 법칙』 파트2의 2장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어떤 A를 무한대로 원하고 있는 상태라면 A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위의 수식처럼 1을 향해 무한대로 다가가고 있는 상태라면 '반드시 1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내가 어떤 상황이 발생하기를 무한대로 원하고 있고, 그 상황을 향해 무한대로 가는 것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라면 그 상황은 무조건 발생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식사를 충분히 하기를 무한대로 원하고 있습니다.
일상 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로 식사를 하지 않을 생각인 사람은 없습니다.
충분한 식사를 하는 것이 최우선의 가치로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식사를 반복적으로 못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면 그 어떤 일을 제쳐두고서라도 식사를 하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의 일을 전혀 보장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일상 생활을 하는데 충분한 식사를 하는 것을 무한대로 원하고 있는 사람은
앞으로 충분한 식사를 하는 것이 반드시 현실화될 것이라고 이야기해볼 수 있습니다.(신의 관점)
0.999999999⋯ 이 1과 같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요.
물론 인간의 관점에서 내가 앞으로 충분한 식사를 할 수 있을지는 전혀 보장할 수 없습니다.
내가 어떤 고정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유무력의 법칙을 알면 나에게 당연히 큰 도움이 된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유무력의 법칙을 악착같이 열심히 공부하려고 한다고 해보겠습니다.
이 상태는 중도의 상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무력의 법칙을 알면 나에게 당연히 큰 도움이 된다.'라는 생각은 치우친 생각입니다
어떠한 생각이든 고정된 생각은 치우친 상태에 해당하고,
치우친 상태는 중도 상태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이번에는 '유무력의 법칙을 알아서 나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라는 중도에 가까운 생각을 일부러 하려고 한다고 해보겠습니다.
중도의 상태가 좋다고 생각하여 일부러 중도 상태에 있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도의 상태가 당연히 좋다.'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치우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일부러 중도 상태가 되려는 것 자체가 치우친 상태인 것입니다.
지금 내가 치우친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그냥 놔두는 것이 중도 상태입니다.
나의 생각이 치우친 상태라 하더라도 그 치우친 상태를 거쳐야만 중도 상태를 향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치우친 상태를 거치지 않고 중도 상태를 갈 수는 없습니다.
외줄타기를 한다고 해보겠습니다.
외줄 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을 '중도 상태'라 하고,
좌우로 떨어지는 것을 치우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억지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자체가 치우친 상태입니다.
떨어지면 떨어지는대로 놔두는 것이 중도 상태입니다.
떨어지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떨어지지 않는 기술을 익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치우친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사람이 치우친 상태에 있을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며
치우친 상태에 있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중도 상태를 향해 더 빨리 갈 수 있습니다.
억지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쓸 때 계속 떨어지게 됩니다.
석가모니는 낙행과 고행을 경험해봤기 때문에
낙행과 고행이 아닌 중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외줄타기에서 양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해본 사람이
떨어지지 않고 줄타기를 잘할 수 있게 됩니다.
중도 상태를 향해 계속 가는 상태도 또 하나의 중도 상태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가 낙행과 고행을 벗어나서 중도에 있는 것도 중도 상태이고,
자연스럽게 낙행과 고행을 경험하고 있는 상태도 또 하나의 중도 상태라 말할 수 있습니다.
외줄타기에서 떨어지지 않고 줄 위에 잘 서 있는 것도 중도 상태이고,
자연스럽게 좌우로 떨어지는 경험을 하는 상태도 또 하나의 중도 상태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미 항상 중도 상태를 향해 가고 있고,(신의 관점)
이미 중도 상태이며,(신의 관점)
우리는 중도 상태를 향해 가기를 원하면 됩니다.(인간의 관점)
4. 생각은 구부러진 철사와 같다.
내가 어떠한 생각을 한다는 것은 중도 상태를 향해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동안에는 내 노력으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그것이 아님을 깨달았고,
그 결과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해보겠습니다.
처음에는 '내 노력으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1)라는 생각을 했고,
후반에는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2)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생각은 서로 반대되는 생각입니다.
처음에 (1)의 생각을 하다가 반대의 생각인 (2)의 생각을 하게 되면
두 생각이 서로 상쇄되어 생각이 사라지는 상태가 됩니다.
이 상태가 우리가 가고자 하는 상태입니다.
양 쪽의 생각이 모두 사라지는 상태가 우리가 앞으로 있으면 하는 상태입니다.
조금 더 명확히 말하면,
내 인생은 하늘의 뜻에 의해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 내 뜻에 의해 흘러가는 것도 아닌 아닌 중도 상태입니다.
내가 어떤 치우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철사가 한 쪽으로 구부러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과 반대되는 생각을 하는 것은
한 쪽으로 구부러져 있는 철사를 반대쪽으로 다시 구부리는 것과 같습니다.
한 쪽으로 구부러져 있는 철사를 반대쪽으로 한 번 구부리면
철사는 대략 중간쯤으로 오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치우친 생각을 하고 있다가 반대되는 생각을 하게 되면
두 생각이 사라진 중도 상태에 가깝게 다가갑니다.
철사가 구부러져 있는 것은 치우친 생각에 사로 잡혀 있는 것과 같고,
철사가 곧게 펴져 있는 것은 치우친 생각이 없는 중도 상태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유무력의 법칙 5대 실천법 _ part 1'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은 내 탓이다.'라고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은 이유는
일반적으로 우리는 흔히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은 내 탓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은 내 탓이다.'라고 생각을 하게 되면
두 생각이 서서히 상쇄되어 두 생각 모두 하지 않는 중도 상태가 됩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상태는 '내 탓이다.'라는 생각도 '남의 탓이다.'라는 생각도 없는 중도 상태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나타난 것은
내 탓도 아니고, 남의 탓도 아닌 중도 상태입니다.
구부러진 철사를 곧게 펴기 위해서
철사를 곧게 펴고 무거운 물체로 철사를 눌러놓으면 철사가 서서히 펴집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방식으로는 너무 오래 걸립니다.
철사를 빠르게 펴기 위해
구부러져 있는 철사를 반대쪽으로 한 번 구부리면 철사가 금방 펴집니다.
마찬가지로 한 쪽의 치우친 생각을 오래 하고 있었을 때
그 생각을 빠르게 없애는 방법은
반대쪽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 상황의 원인은 남에게 있다.'라는 생각을 오래 하고 있었을 때
'이 상황은 내 탓도 아니고, 남의 탓도 아니다.'라는 중도에 해당하는 생각을 하려고 한다면
'마음에 들지 않는 이 상황의 원인은 남에게 있다.'라는 생각이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때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이 상황의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깨달음으로써
'마음에 들지 않는 이 상황의 원인은 남에게 있다.'라는 생각이 빠르게 지워집니다.
우리는 최종적으로 중도 상태를 향해 가면 됩니다.
5. 이 세상은 항상 중도 상태만 이루어진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 본인의 기준으로 항상 중도 상태에 있습니다.
아무리 잘나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 본인의 시각으로 보면 자신은 평범합니다.
이 우주는 항상 중도를 향해 가고 있고,
이미 중도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중도 상태만을 원할 수 있습니다.
중도 상태가 아닌 상태를 원해도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중도 상태가 아닌 상태는 자신이 그것을 원한다고 착각할 뿐 실제로 자신이 원하는 상태는 아닙니다.
인생은 자신이 원하는대로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과한 것도 진심으로 원하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한 것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과한 것'이라고 표현한 것 자체가 자신에게 맞지 않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많은 돈을 벌려면 자본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정도의 많은 돈이 있는 것이 과하지 않으려면 자본가이어야 하는 것이죠.
자본가가 아닌데 그 정도의 많은 돈이 있는 것은 과한 것이 됩니다.
스스로 자본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그 정도의 돈은 생길 수 없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고 싶다면 그 분야에 대해서 스스로 학생이 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학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공부를 많이 할 수 없게 됩니다.
학생이 아닌데 그 정도의 공부를 하는 것은 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A라는 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A가 이루어져도 과하지 않은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나에게 과하다.'라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항상 중도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원하는 것이 자신에게 과한 것이라면 '붕 뜬 기쁨'이 느껴집니다.
어떤 A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상황을 상상해봤을 때
'붕 뜬 기쁨'이 강하게 느껴질수록 그 A는 붕뜬기쁨이 느껴지는 만큼 과한 것입니다.
붕 뜬 기쁨이 느껴지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붕 뜬 기쁨이 느껴져도 일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붕 뜬 기쁨이 느껴지는 만큼만 이루어지지 않고, 그 나머지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서울대에 합격하는 장면을 상상해봤는데
붕 뜬 기쁨이 느껴졌다고하여 대학교에 아예 가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울대가 아닌 다른 학교에 합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는 올해가 아닌 내년에 서울대에 합격할 수도 있습니다.
감정은 대신 느껴볼 수 없는 것이므로
붕 뜬 기쁨이 어떤 감정인지는 스스로 경험을 통해 확인해보셔야 합니다.
내가 어떤 원하는 것에 대해 붕 뜬 기쁨을 느끼고 있어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겠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무'의 받아들임이 '유'를 현실화시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