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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 Feb 11. 2024

제8화 차가워진 세상, 따뜻함의 잔상

 알람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아침 7시쯤 되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 가끔은 괴롭다. 푸지게 늦잠을 자보고도 싶은데 내 몸뚱이는 도통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


 ‘답답하다. 너무 답답해.’


 일어나자마자 든 생각이다. 뼈에 피로가 각인된 기분이다.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는데 익숙해진 내 신체리듬은 여전히 새벽 1시까지의 근무를 버거워하는 중이다. 오늘은 3일 근무를 끝내고 맞이하는 3일의 휴무 중 첫날이다.


 버거움을 가득 안은 채 아침을 맞이했다.


 침대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씻지도 않고 모자를 꺼내어 푹 눌러쓴다. 그리곤 마스크를 착용한다. 자고 있는 룸메가 혹시나 깨지 않을까 걱정하며 조심스레 외투를 걸쳐 입고 문밖을 나선다. 허기가 진다. 숙소 건물에 있는 편의점으로 먼저 향한다. 평소 자주 사 먹던 단백질 바 2개를 구매하곤 곧장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목적지를 찍지 않은 채 무작정 가속 페달을 밟는다. 어두운 지하 주차장을 뒤로하고 바다가 보인다. 숨통이 조금 트이기 시작한다. 좀 더 달리다 보니 바닷가 근처에 꽤나 규모가 큰 주차장이 보인다. 차를 세워야겠다. 바다를 눈앞에 두고는 의자를 한껏 뒤로 젖힌다. 편의점에서 사 온 단백질 바를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내 먹는다. 달콤하고 짭짤한 게 바삭하기까지 하다. 내가 좋아하는 식감과 맛을 한 데 모았다. 하늘을 바라본다. 맑다. 구름이 뭉게뭉게 예쁘다. 이내 시선을 바다로 돌린다. 파랗고 잔잔하다. 살 것 같다. 단백질 바에 묻은 초코가 유독 기쁘게 달다. 원래 초콜릿을 먹으면 얼굴에 자주 여드름이 나곤 해서 자제하는 편인데 오늘은 좀 먹어야겠다. 아니, 실은 제주에 내려와서 꽤 자주 먹는다. 여행은 종종 스스로에게 내건 통제를 조금 내려둘 좋은 명분이 되곤 한다.


 “사서 고생을 한다. 사서 고생을 해 너는.”

 “이것도 다 내 자산이고 경험이지.”


 엄마와의 통화에서 서로 나눈 대화를 곱씹어 본다. 둘 다 맞는 말이다. 내 모든 경험은 자산이나 고생은 고생이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많이 지쳐버렸다.


  ‘뭘 하려고 제주에 왔더라.’

  되짚어본다. 순간 생각이 흐릿했다. 눈을 감았다. 흐려진 생각이 형태를 드러낼 때까지 좀 더 집중했다.


 ‘일상과 멀어지려고. 그렇게 한 발자국 뒤에서 일상을 바라보려고.’

  생각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맞아 그랬지. 그게 내가 한 달간 제주에 온 이유였지. 일상과는 확실히 멀어졌는데 한 발자국 뒤에서 내 일상을 바라보는 건, 잘하고 있는 건가.


 가끔 수단이 목적을 앞질러 가는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목적이 수단에 가려 흐릿해진다. 어쩌면 그 기점에 와버린 게 아닐까 스스로에게 자문해 본다. 겨우 보름 좀 넘게 지났는데 이럴일인가. 자동 자책모드가 되려는 스스로에게 브레이크를 걸고 나를 다독이기 시작한다.


  사실 제주에 오면 하루에 한편씩 글을 쓸 작정이었다. 글쓰기는 지난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그 다짐이 무색하리만큼 나는 글을 써내지 못하고 있다.


  목포에 있을 땐 글이 술술 써졌는데 제주에 오고 나서 오히려 글이 안 써진다. 예상과 어긋나는 상황이다.


  글이 요리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글로 나의 모든 일상을 낱낱이 담아낼 순 없다. 특정한 단면만 비춰낼 수 있다. 그렇기에 요리를 할 때처럼 글감이라는 재료의 어떤 단면을 어느 정도로 잘라낼지 결정하고 내가 바라보는 형태가 반영될 수 있게끔 손질해야 한다. 그리고 나만의 문체로 조리해야 한다. 목포에 있을 땐 어떤 단면을 잘라낼지 결정이 빨랐다. 그리고 자르고 싶은 부분과 양이 명확했다. 글도 순조롭게 써졌다.

 

 하지만 제주에 온 이후론 어떤 단면을 비추고 싶은지부터가 불명확해졌다. 목포에서의 일상에 비해 일어나는 일의 양이 많아서인지, 아님 비춰내고 싶은 인상적인 단면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소진된 나의 체력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목포에서 보다 훨씬 글이 잘 써질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무언가를 관찰한다는 것 말이다. 그건 애정에 기반한 일이다. 나는 사실 지금 내 주변에 놓인 인물과 상황들을 깊게 관찰을 할 만큼 애정하지는 않는다. 애정하지 않는 것을 관찰하는 게 꽤나 고역스럽다. 그들과 나의 이야기에서 잘라내고 싶은 단면이 한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답답하다


 발견. 남들은 그냥 지나치는 작은 돌부리에도 걸려 넘어지는 나의 정신적 연약함 덕에 나는 눈에 띄지 않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데 꽤나 재능이 있다. 좀 더 애써서 관찰해 보면 발견할 무언가가 보일까. 뭐라도 발견하기 시작하면 관찰하고 싶어 질까.


 머릿속이 너무 지저분한데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정리를 하려면 어디에 무엇을 놓을지 구획화를 시켜야 하는데 그 구획화. 이게 지금 안된다. 혼란스럽다.


 춤을 춰야겠다. 곧장 시내에 있는 댄스 연습실로 향했다.


 춤은 몸에 좋은 운동이기도 하지만 두뇌에도 좋은 운동이다. 내 몸으로 내가 만들고 싶은 동작을 따라 만드는 과정에서 머리를 꽤나 써야 한다. 실제로 안무를 따다 보면 머리가 아프다. 그렇게 머리를 써서 안무를 따고, 춤을 추다 보면 머리와 몸의 협응력이 높아진 느낌이 든다. 그렇게 높아진 협응력은 자주 얽히는 내 머릿속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데 간접적인 도움을 준다. 한 2시간 정도 쉬엄쉬엄 춤을 추었다. 연습을 마치곤 근처에 있는 피부과에 가서 진료를 봤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던 내가 새벽 2시쯤 자버릇하니 피부가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일정을 모두 마치고 숙소에 도착하니 대략 저녁 7시쯤 됐다. 룸메는 근무하러 나갔고 숙소는 조용하다. 창밖으로는 야경이 비추고 몇 대의 차들이 왔다 갔다 움직이며 지루한 풍경에 생기를 더한다.

 ‘이 고요가 나는 너무 고팠지.’

 노곤한 몸을 소파에 기댄다.


  불현듯 예측하지 못한 왠지 모를 외로운 감정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 그게 사람을 외롭게 하는 건가.’


  여러모로 결이 맞지 않은 사람들과 상황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는 것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외로운 일이었다. 혼자 있을 때 종종 느꼈던 외로움과는 차원이 다른 짙고 두꺼운 외로움이었다.


 ‘곁에 누군가가 있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건 아니었지.  되려 더 외로워질 수도 있었지.’

 ‘그럴 수 있지.‘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과거의 기억을 잠시 곱씹으며 자명한 사실을 받아들였다. 느껴지는 외로움을 천천히 삼켜봤다. 눈을 감고 간만에 주어진 달콤한 고요에 다시 한번 집중했다. 그렇게 외로움을 소화시키려 노력했다.


‘언제부터지.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외로웠던 거지.’

기억을 찬찬히 되짚어 본다.


 “게임할까요.”

 유독 바에 앉은 손님들끼리 화기애애한 날이었다. 덩달아 신이 난 직원 혜선이는 손님들에게 게임을 제안했다.


“아 좋죠.”

손님들은 흔쾌히 게임 제안을 승낙했다.


”눈치게임 해요.“

”에게, 무슨 대단한 게임할 줄 알았는데 눈치게임이요?“

”네, 직원은 빼고 여러분들끼리만.“

”엥? 두 분도 포함해서 해야죠.“

”에이, 여러분 끼리 해야죠“


”일!”

손님들과 직원 혜선이가 가벼운 실랑이를 벌일 동안 나는 재빨리 일을 외쳤다.


“이”

“삼”

“사”

“오”

“육“

“칠.”

“아… 팔.”


 총 6명의 손님들이 펍에 방문한 날이었다. 같은 직장에서 만나 친해진 두 분, 중학교 때부터 친구 사이신 세 분, 긴 겨울 휴가를 받아 성산에서 한 달 살이 중이신 한분 이렇게 총 6명의 손님들이 펍의 바에 자리했다. 다들 밝은 에너지를 가지셔서 인지 처음 본 사이라는 게 무색할 만큼 금세 서로 친해졌다.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외로움이 수면 위로 드러났던 날이.

 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방해가 되는 감정은 외면해 버리는 무의식적인 나의 습관이 또 발동했나 보다. 외면당한 감정은 늘 지극히 평범한 상황에서 뜬금없이 터져버리곤 만다. 이렇게 글을 쓰고 나서야 그때의 감정을 마주한다.

 

 밝은 표정을 띤 손님분들과 직원 혜선이의 모습, 하하 호호 웃는 손님들의 소리가 순간 아득히 멀어지며 나는 어느 심연으로 동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도 분명 함께 웃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굳어버렸다.


 ‘뭐지,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이 느낌은.’

 오랫동안 느끼지 못해 낯설지만 언젠간 느껴본 기분이다.


 학창 시절 줄곧 그리고 대학교에 다닐 때까지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내가 가진 감정의 기저에 깔린 베이스였다. 없는 게 오히려 어색한, 깊고 넓은 감정이었다. 예민하고 민감한 나는 꽤 자주 남들과 내가 다르다고 느꼈고, 그걸 누군가에게 들키면 놀림의 대상이 되거나 세상밖으로 아웃될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늘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과 아주 비슷한 가면을 쓰려 노력했다. 그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날 둘러싸고 있어도 그들과 어우러지기보단 그들 주변을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그저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음에 안도하며 겉도는 나를 들키지 않으려 가면 위에 또 다른 가면을 덧대어 쓰곤 했다. 시간이 지나 가면이 두꺼워질수록 그 가면을 벗는 게 점점 더 두려워졌다. 그러다 점차 가면의 무게에 짓눌려 숨이 차기 시작했다.


 우연한 계기로 벗겨진 가면에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를 적이 있었다. 그때 오히려 ‘멋지다’ 라는 말을 건네며 손 내밀어 주었던 누군가에 의해 그저 나는 나의 착각 속에 갇혀 살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를 숨기지 않고 세상에 드러낼 용기를 얻었다. 그렇게 가면을 벗고 나를 세상에 드러내기 시작했고 그 후로 나와 같은 결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 세상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인연이 소중해서 손을 꼭 잡았다. 되돌아보건대 그렇게 전해진 그들의 온기 덕분에 최근까지 나는 꽤나 오랫동안 외롭지 않았다. 그렇게 외롭지 않음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외로움이 어떤 감각으로 내게 다가오는지 너무 오랜 시간 잊고 있었다. 그렇게 잊고 있었던 외로움의 감각이 되살아나고 나서야 그 사실을 인지한다. 충전기 같은 역할을 해주었구나. 내 곁의 사람들이. 새삼 고마움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사람사이 관계에 있어서 저절로 애가 써진다는 건 참 벅찬 일이고, 억지로 애를 써야 하는 건 참 외로운 일이었지. 아무런 가면을 쓰지 않은 채 손을 잡을 수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나는 그리워졌다.

 

 이번 제주 여행을 마친 후 답을 내려고, 여행 전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이 있었다.

“익숙해진 일상 속에서 당신은 행복했나요 아님 불행했나요?”

 일상에서 멀어져야지만 답을 낼 수 있는 질문말이다.


 답이 나왔다. 나는 내 익숙했던 일상 속에서 행복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니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리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따뜻함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나는 세상이 좀 차가워지고 나서야 따뜻함의 온기를 기억해 냈다. 사람 참 간사하다.


 아무튼, 떠나오길 잘했다.

 슬슬 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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