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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 Feb 11. 2024

제9화 삶의 신기루, 행복과 불행

 “저는요. 매일 취하는 게 이번 여행의 목적이에요.”

연속 3일을 펍에 방문하신 30대 초반의 여성 손님은 취기를 머금은 눈을 허공에 응시한 채 내게 말했다. 나는 자동 반사적으로 나오는 ‘왜’ 라는 질문을 억지로 눌러 삼켜버렸다. 손님의 답변이 혹시나 너무 거대해 나를 짓누를까 봐 지레 무서웠던 까닭이다.

 펍에서 근무하는 동안 수많은 손님들을 만났다. 그들은 각자의 사연을 머금고 있었고 대부분 ‘왜’ 라는 물음을 반겼다.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 까닭에  펍에서 근무하는 동안 손님들에게 질문을 건네고 그들의 사연을 듣는 것이 매우 즐거운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맞닥뜨린 현실은 늘 기대했던 세상보다 더 거대하곤 하다. 그 기대치 못한 여분의 세상에서 나는 자주 진이 빠진다. 수 없이 반복되는 같은 유형의 질문들과 가끔은 기다렸다는 듯이 끊임없이 감정을 쏟아내는 손님들을 연신 접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왜‘라는 질문을 억지로 삼켜버리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게 조금씩 체해갔던 것 같다.


 이번에도 습관적으로 ‘왜’ 라는 질문을 삼켜버렸다. 어떤 부분이 좋아서 사귄 연인이 그 점 때문에 다시 싫어진 그런 느낌이랄까. 이제는 온전히 처음의 마음 그대로를 간직한 채 오래 좋아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긴 할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해결되지 않은 ‘왜’ 라는 질문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 머릿속을 끊임없이 부유한다. 현실에 널브러진 해결해야 할 표면적인 일거리를 모두 마치고 나면 이 하염없이 부유하는 해결되지 않은 질문 찌꺼기들을 애써 치워보곤 한다.


 근무를 마친 뒤 취하고 싶어서 여행을 왔다는 손님이 살던 세상을 잠시 상상해 본다. 아마도 불행한 세상이었겠지. 불행은 불청객 마냥 늘 환대받지 못하니까.


 불현듯 가위에 눌리다 잠에서 깬 오늘 아침의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꿈 속이다. 꿈속이란 걸 안다. 몸이 맘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온몸에 힘을 주는데 겨우 손가락 하나 까닥할 뿐이다. 허망하다. 깨고 싶다. 너무 깨고 싶은데 깨질 않는다. 너무 힘이 든다. 숨도 막혀온다. 고통스럽다. 깨려고 한참을 애쓰다 겨우 눈을 떴다. 쉬지 못했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쉰다.


 익숙한 풍경이 보인다. 창밖으로 보이는 큰 도로와 바닷가, 침대 옆에 위치한 베이지색 소파, 그 옆 침대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는 룸메.

‘이건 현실이겠지.’


내 이성은 그렇게 몇 초간 꿈과 현실 사이를 배회하다 이내 현실에 안착한다.


‘깼다. 다행이다.’

 불행한 꿈속을 배회하던 나는 한 동안 숨 막혀 떠나고 싶었던 이 숙소가 너무나 반가워 일시적인 행복에 도취됐다.


“나 혹시 자면서 무슨 소리 안 냈어?”

낮잠을 자다 깬 나는 룸메에게 물음을 건넸다.


“냈어요. 언니 끙끙거리던데요.”

“그랬지. 가위눌렸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위에 자주 눌렸다. 고민을 많이 하거나 공부를 많이 한다거나와 같이 머리를 많이 쓴 날에 유독 가위에 잘 눌리곤 했다. 고등학교땐 시험기간이 되면 쉬는 시간에 책상에 엎드려 선잠을 자다가도 가위에 눌리곤 했다. 왜 머리를 많이 쓴날 가위에 눌리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나 혹시나 앞으로 또 끙끙대는 소리 내면 꼭 깨워주라. 가위눌리면 늘 그래서.”

 “네, 그럴게요.”

 또다시 가위에 눌릴 때를 대비에 룸메에게 부탁의 말을 건넸다.


 가위에 눌리면 몸이 움직이지 않는 건 참겠는데 숨이 막혀오는 건 너무 고통스럽다. 그게 현실이 아니라 꿈속이라는 걸 늘 알고 있다. 하지만 숨이 막히는 게 현실과 같은 감각으로 느껴지는 까닭에 많이 고통스럽다.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을 때도 있다. 그 덕에 어렸을 때부터 ‘죽음’ 이라는 현상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보는 계기를 얻긴 했다.


“하. 너무 힘들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한참을 넋을 놓고 앉아있었다. 뇌는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던데 꿈과 현실도 구분하지 못하나 보다. 가위에 눌렸다가 겨우 깨면 실제로 온몸에 진이 다 빠져버리곤 한다. 가만 보면 뇌는 아무래도 내 편이 아닌 것 같다.


 불행한 꿈의 등장에 불행했던 내 현실은 잠시동안 대조적으로 행복해졌다. 불행에 휩싸여 있을 땐 문득 기대하지 않았던 조그마한 행복을 마주하면 잠시나마 그게 커다란 행복처럼 느껴진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불행이 늘 불행한 것만은 아니다.


 아마 그 손님에게 있어 ‘취함’ 은 현실의 불행에 대조되는 행복을 그려내려는 그녀만의 발버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깨고 싶지 않을 수 있겠다. 계속 그 대조적인 행복에 머무르고 싶을 것 같다. 하지만 결국엔 깰 텐데, 오랫동안 취해있었던 만큼 어쩌면 오랫동안 허망하겠다. 잠시 그 허망함을 상상해 보았다. 초콜릿을 좀 더 드릴걸 그랬다.


 불현듯 유시민 작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의 뇌는 일종의 생존기계이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주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않는다. 행복 호르몬인 도파민은 기대했던 것을 넘어서는 보상이 왔을 때 분비된다. 고로행복은 고통이나 시련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이를 달리말하면 무언가에 불만족한다는 건  곧 행복해질 수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불만족으로 인해 낮아진 기대치는 어떤 현상을 기대 이상이라 평가할 확률을 높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보자면 사실 행복과 불행은 뇌에서 벌어지는 일시적인 신호체계의 교란 또는 정상화에 불과하다.’


 ‘물론 행복하면 좋겠지만, 꼭 행복해야하는 건 아니다.’


라는 말들에 깊게 고무됐던 적이 있었다.


 인간인 이상 뇌의 정상화 시스템에서 벗어날 순 없다. 잠깐은 불행할 거고 잠깐은 행복할 거다. 하지만 쭉 불행하진 않을 거고 쭉 행복하지도 않을 거다. 그냥 파도가 일면 타면 그만이다. ‘행복해야 한다’ 의 문장으로 굳이 스스로 감옥을 만들어 갇힐 이유는 없는 것 같다.


‘그나저나 잠에 들어야 할 텐데. 오늘은 또 몇 시에나 잠에 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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