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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 Feb 11. 2024

제10화 작은 나뭇가지, 커다란 허세

 작은 새 두 마리가 전봇대 위에 걸쳐 앉아있다. 이내 한 마리의 새가 날아 땅으로 내려오더니 도로 위에 떨어져 있는 작고 가느다란 나뭇가지 하나를 문다. 그리곤 원래 앉아있던 자리로 다시 날아 올라간다.


 ‘아고.’

 새가 물고 올라간 작고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다시 땅으로 떨어져 버린다. 새가 놓쳤나 보다. 어느새 나는 유심히 그 새를 관찰하고 있었다. 뭔가 새에게 소중한 것 같았는데 놓쳐버린 것만 같아 가서 주워주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새는 다시 날아 내려오더니 떨어진 나뭇가지를 입에 물곤 전봇대 줄 위로 날아 올라간다.

‘잘했네.’

 보잘것없는 나뭇가지를 저 새가 끝까지 지켜내기를 내심 바랬다. 저 나뭇가지에는 분명 저 새에게만은 커다란,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 거라 짐작했다. 그렇게 새를 거울삼아 나를 비춰봤다. 창 밖에 전시된 풍경에 나를 투영시키며 관찰을 이어갔다.


 그동안 옆에 있는 다른 한 마리의 새는 묵묵히 옆자리를 지켰다.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운 새가 돌아오고 나서 한 30초 후쯤이었을까. 옆자리의 새는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그 새가 향하는 방향으로 다른 새도 나뭇가지를 입에 꼭 문채 따라 날아간다. 그렇게 두 마리의 새는 창틀의 프레임을 넘어 어딘가로 사라졌다.

 ‘예쁘네’

 대견함이었을까 부러움이었을까. 찰나의 감정을 머금은 채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근 한 달간의  스탭 근무를 마치고 칩거하고 싶은 숙소를 골라 5박을 예약했다. 숙소의 창 앞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며 물방울로 얼룩진 창밖으로 두 마리의 새가 그려내는 풍경을 감상했다.

 

 제주는 며칠째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친다. 비바람을 헤치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숙소에 짐을 옮기는 일은 생각보다 진 빠지는 일이었다. 그나마 숙소가 2층이라서 다행이었다. 처음엔 3박만 예약했다. 그러곤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앞으로 며칠 내내 비예보가 있었다. 비바람 속에서 다시 짐을 내리고 5시간 동안 배를 탄 뒤 집에 도착해 짐을 푸는 나를 상상했다. 아마 몸살이 날지도 모른다. 여행의 끝을 몸살로 끝낼 순 없다.


 ‘비가 그치는 날에 떠나자.’


 그렇게 2박을 더 연장했다.


 숙소는 아주 마음에 든다. 한 벽면이 통창으로 되어있다. 그 앞엔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위치하고 있다. 창 밖으로는 한산한 시골의 골목과 드문드문 위치한 낮은 높이의 건물들 그리고 좀 더 시선을 멀리하면 바다가 보인다. 맘에 드는 풍경이다. 이 정도의 공간은 내 사색의 크기를 충분히 포용할 수 있다.


 그렇게 5박 동안의 진짜 여행을 시작했다.


 나는 여행을 하면 관광하기보단 살아본다.


 내 숙소에 기준점을 찍고 그 주변의 좁은 반경을 도려낸다. 그 반경 안의 골목을 배회하고 관찰한다. 그리곤 그 낯선 반경 안에서 애정하는 몇 가지를 찾아낸다. 사색하기 좋은 카페라던지, 맛있는 밥집이라던지, 심금을 건드리는 술집이라던지, 맘에 드는 골목길이라던지 그냥 발길이 향하는 어떤 곳 말이다. 애정이 생기기 시작하면 낯설었던 곳은 점차 익숙해진다. 그렇게 익숙함의 농도가 짙어지면 목포라는 헌 시간은 한 꺼풀씩 벗겨지고 여행지라는 새 시간이 차츰 입혀진다.

 그게 내가 시간을 다시 써내는 방식이고 여행을 떠나는 이유이다. 감히 손댈 수 없는 시간을 주무르다 보면 점 같은 내가 잠시 좀 커져서 거대했던 어떤 세상사는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아진다. 그렇게 잠시 잠깐 몸짓을 한껏 부풀려 거대했던 세상사 앞에서 허세를 부려보기도 한다. 넌 별거 아니라고. 아무도 내게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부리는 한 없는 허세를 스스로에게 허락하며 잠깐의 해방감에 도취되어보기도 한다.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여행에서 끝까지 놓치고 싶지 않은 내 작고 가느다란 나뭇가지 안에는 그런 커다란 나의 율동이 담겨있다.


 펍에서 근무하는 동안 잠을 청할 때마다 내 영혼은 침대로 한없이 추락하는 신체와 공중을 유영하는 수많은 생각들 사이 그 어딘가 쯤에서 끊임없이 배회했다. 그 까닭에 깊게 잠들어본 적이 단 하루도 없었다. 신체를 돌볼 에너지도, 배회하는 영혼에게 길을 찾아줄 에너지도 없던 나는 내 안의 수많은 소리들에 대하여 잠시 가장 쉬운 선택지인 외면을 건네기도 했다. 눈앞에 놓인 당장의 해야 할 어떤 일들은 자주 그렇게 보잘것없어 보이는 어떤 나뭇가지를 놓아버리게 만든다. 꽤나 수차례, 나는 내 작은 나뭇가지를 땅으로 떨쳐버렸다.


 가끔은 볼 수 있다는 게 사람의 눈을 가리는 것 같다. 보이는 세상에선 그 해야 할 일들이 참 거대한데 보이지 않는 세상에선 실은 작은 나뭇가지가 더 거대하다. 눈을 제대로 감지 않은지가 오래된 것 같다.


 김밥으로 배를 채우고, 창밖의 풍경으로 마음을 채운뒤에야 나는 노트와 펜을 집어 들었다. 외면했던 수많은 소리를 경청했다. 마음을 눌러 글을 적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글을 써낸 후 거실에 놓인 tv를 지나쳐 침대로 향했다.


 내 숙소의 tv는 tv라기보단 오브제에 가깝다. 숙소에 와서 단 한 번도 tv를 켜지 않았다. 나는 원래 tv를 보지 않는다. 아니 보지 못한다. 내가 소화하기엔 tv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또한 tv속 영상에 매개된 수많은 타인의 점철된 의도들이 내겐 너무 어지럽다.


 의도가 없는 창밖의 풍경, 작가 한 명이 넌지시 읊조리는 책의 문구들, 움직이지 않는 그림이나 사진, 귀로만 들을 수 있는 음악. 한 명의 출연자가 하는 강연.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속도와 양은 딱 거기까지이다.


 소화가 더딘 나는 늘상 세상의 장면들을 쉽게 삼켜내지 못한다. 유약한 나는 남들이 지나치는 작은 돌부리에도 쉽게 걸려 넘어지곤 한다. 그래서 도무지 빨리는 앞으로 못 나가겠다. 그래서 달려가는 옆 사람들에겐 염치없이 기다려달라 하진 못한다.

 다만 삼켜내지 못하기에 마주하는 장면 하나하나 조각조각 부셔본다. 이왕 넘어진 김에 놓인 작은 돌부리를 깊게 관찰한다. 혹시라도 넘어져 땅만 보고 있는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근처에 있는 작은 꽃을 손으로 가리켜준다. 내가 가진 속도의 질감은 그러하다.


 그래서 나는 그런 나를 위해 너무 빠른 세상의 속도가 담긴 tv를 지나친 체 차라리 침대 속에서 뒤처지기를 선택한다.


 가끔 나이가 지긋해진 백발의 주름진 얼굴의 내가 정원의 예쁜 꽃을 보며 따뜻한 차 한잔을 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그때의 내가 되어 지금의 나를 회상해 본다. 백발의 주름진 내가 회상하는 지금의 나의 삶이 ‘참 예뻤지’라는 다채로움을 품은 간결한 한 문장으로 그려지길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내 작은 발이 내딛는 삶의 방향은 늘 그곳을 향한다. 아마도 지금의 뒤쳐짐을 그때의 내가 예뻐할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보잘것없는 내 나뭇가지를 끝까지 놓치지 않을 작정이다.


 오늘은 간만에 아주 꿀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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