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쫀쿠 오픈런으로 시작된 서울행

by 서강


서울 밤공기가 말을 걸어왔다

1월 14일 저녁, 기차에서 내리자 공기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차갑고 분주한 숨결이다. 플랫폼 끝 13호차 앞에 큰딸이 서 있었다. 사람들 틈에서 나를 단번에 알아본 얼굴. 그 순간, 이미 마음은 절반쯤 풀어졌다.

서울은 밤에도 숨을 쉰다. 출근길 사람들 발걸음은 바쁘고, 식당 창가엔 혼자 먹는 밥이 외롭지 않다. 여의도라는 이름이 잠시 마음을 흔들었다.



욕심을 버리자 마음이 또렷해졌다

이번 서울행은 달랐다. 예전의 나는 늘 욕심이 많았다. 서울에 오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을 최대한 만나야 했다. 온 김에, 여기까지 왔는데. 그 말들이 나를 몰아세웠다.


"엄마, 이번에 서울 오면 친구들은 안 만나?"

"응, 이번에는 너에게만 집중하려고."


말은 짧았지만 마음은 길었다. 올해 내가 붙잡은 단어는 하나다. 정리.

선택을 줄이니 마음이 또렷해졌다. 집중을 하니 시간이 깊어졌다. 딸과 밥을 먹고, 걷고, 웃는 시간이 좋았다. 한 사람에게만 마음을 쓰는 일이 이렇게 편안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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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도 위로도 깔끔했다

다음 날 아침, 요즘 인기상승중인 두바이 쫀득 쿠키를 구매하기 위해 생전 처음 오픈런이란 걸 해봤다. 그런데 내 앞에서 마감됐다. 찬 바람에 아쉬움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실패도 이렇게 깔끔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뜻밖의 위로를 딸 남자친구가 선물했다. 오픈런 실패 소식을 듣고 주변 다른 곳을 찾아 2개를 사 와서 건네준 것이다. 사소한 것에서 마음 씀씀이를 느낄 수 있었다.


조향사 자격증을 취득 후, 매장을 오픈한 조카에게 방문했다.

빌딩 입구에 들어서자 향기가 먼저 반겨줬다. 인테리어 하나하나 정성이 깃들어 있었다. 공간에는 치밀함이 있었고, 태도에는 확신이 있었다. 가격보다 가치가 먼저 보였다. 조향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애쓴 조카의 노력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잠시 몇 가지 향을 맡았는데도 코가 제 기능을 상실할 정도인데 정말 대단하다는 말로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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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게 더 쉬웠어 고모야"

내 기억 속의 꼬꼬마였던 조카는 사라지고, 나름의 가치와 철학이 담긴 한 사람이 거기 있었다. 꼬맹이가 훌쩍 자라서 맛있는 저녁도 대접했다. "이제 내가 너한테 대접도 받고 흐뭇하다."


돌아오는 길, 딸이 말했다.

"언니야는 좋겠다. 이런 고모가 있어서."

"나도 엄마 같은 이모나 고모가 있으면 좋겠어."

딸 말에는 조카를 향한 부러움이 섞여 있었다. 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딸에게 어떤 엄마였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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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날, 다시 오픈런에 도전했다. 이번에는 성공하기 위해 1시간 일찍 도착했다. 2등으로 줄을 서며 모두의 행운을 빌었다. 기다림은 나눌수록 덜 추웠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지 않나요?

좋아하는 연극을 보러 갈 시간이 없어 아주 조금은 아쉬웠다.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만 선택하면 놓치는 게 많지 않나요?"

"서울까지 왔는데 그것만 하고 오면 아깝지 않아요?"

맞다. 욕심을 버리면 분명 무언가는 놓친다.


하지만 남은 건 더 진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다음에는 연극만 보러 오면 되니까. 이번 여행은 딸에게 집중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딸을 편안하게 쉬게 해주고 싶었다. 쾌적한 환경을 위해 집 청소를 시작했다. 정리정돈이 안되어 있고 묵은 때가 잔뜩 쌓인 곳을 보면서 이전 같았으면 잔소리를 거미줄처럼 쏟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잔소리 대신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 새어 나왔다. 잔소리를 예상한 딸은 놀란 얼굴로 웃었다. 필사로 변한 엄마의 모습을 목전에서 목격한 날이었다.


딸이 좋아하는 엄마표 반찬을 만들었다. 손이 먼저 움직이고, 마음이 따라왔다. 집 안에 익숙한 냄새가 가득 채워졌다.


"우리 집에서 엄마표 된장찌개 냄새가 날 수도 있구나"


딸은 연신 감탄했다. 이 냄새 덕분에 딸과의 추억이 하나 더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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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밥을 먹이고 싶은 엄마 마음으로 딸 남자친구를 초대했다.


"어머니 음식 솜씨 진짜 좋으세요."

"뭔가 맛있는 맛을 아시는 것 같아요."


칭찬은 늘 쑥스럽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분위기 파악과 립서비스에 탁월한 친구다.

곰살맞은 사위를 보고 싶었는데 제격이라

살짝 욕심이 고개를 내밀었다.


마지막 밤에는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산책했다.


"너와 단 둘이 여유 있게 카페에서 차 마실 시간도 없었네"

"난 이렇게 엄마 팔짱 끼고 걸으면서 이야기하는 것도 좋은데"


사랑스러운 딸 덕분에 차가운 밤공기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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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는 남기는 일이다

부산으로 돌아오는 길은 편안했다. 딸이 예매해 준 퍼스트 클래스 좌석에서 책장을 넘겼다. 이동은 끝이 아니라 정리였다.


집에 도착하자 막내딸이 반겼다. 두바이 쫀득 쿠키에 터진 리액션 덕분에 덩달아 행복해졌다. 기쁨은 이렇게 되돌아온다.


막내 남자친구는 큰딸 남자 친구와는 또 달랐다. 순둥하고 착하다. 막내를 "애기"라고 부르며 참 다정스럽게 대해준다. 두 손을 꼭 잡고 웃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딸들 삶에는 각자 선택이 있다. 사랑을 나누는 방식도, 미래를 미루는 이유도 다르다. 나는 그 곁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



이번 서울행이 확인시켜 준 것들

아이들이 잘 자라고 있다는 사실.

내가 아주 많이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는 사실

정리는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집중이라는 사실

지금 가장 중요한 하나를 남기는 서울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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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당신은 무엇을 남길 건가요?

서울에서 돌아온 뒤, 나는 달라졌다. 일정표를 펼치면 이제 여백이 보인다. 친구 약속을 잡을 때도 묻는다.

"이번 만남에서 진짜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뭐지?"

욕심을 덜어내자 시간이 두터워졌다. 선택을 줄이자 관계가 깊어졌다.


당신도 시작해 보세요.

오늘 하루, 단 한 사람에게만 집중,

이번 주, 단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써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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