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486일]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71
살다 보면 이런 착각을 하는 순간이 있다.
더 많이 알수록, 더 근사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착각. 책을 더 읽고, 좋은 문장을 더 많이 외우면 삶이 깊어질 것 같다는 생각. 그렇게 우리는 오랫동안 바깥에서 답을 찾아 헤맨다.
헤르만 헤세는 고백한다.
"나는 학식이 풍부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진리를 찾는 사람이었으며,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다. 다만 이제는 진리를 별을 바라보거나, 책을 읽으며 찾지 않는다. 내 몸속에서 소리 내는 피가 전해주는 가르침을 듣기 시작했으니까."
뭔가 가슴 한쪽이 조용히 울렸다. 한참을 그 문장 앞에 멈추어 있었다.
얼마 전, 나는 내 마음의 움직임 하나를 발견했다.
기쁨으로 하던 일이 있었다. 아무 조건 없이, 그냥 좋아서 하던 일. 그런데 지인이 건넨 말 한마디가 그 기쁨의 자리에 슬며시 끼어들었다. 긍정적인 말이었다. 나를 생각해서하는 칭찬의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나는 그 일에 조건을 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섭섭함'이 조용히 마음 안으로 들어왔다.
섭섭함은 참 묘한 감정이다. 처음엔 아주 작은 먼지 같다가도, 순식간에 몸집을 불려 상대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날카로운 잣대로 변한다. 힘이 참 세다. 어느새 나는 그 감정에 이끌려, 상대를 평가하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때, 잠깐 멈추었다.
요즘 나는 연습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마음이 흔들릴 때, 바깥을 향해 달려가지 않고 안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가는 것. 그리고 내 안의 나에게 묻는 것이다.
"지금 이 감정은 어디서 온 걸까?"
그날도 그렇게 했다. 억지로 누르지 않고, 그렇다고 휩쓸리지도 않고. 그냥 가만히,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조용한 울림이 들려왔다.
타인을 향한 비난이 아니라, 나를 향한 깨달음이었다. 아무리 긍정적인 말이라도 전달되는 방식이나 타이밍에 따라 상대에게는 커다란 걸림이 될 수 있다는 것. 말의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이 가닿는 마음의 결이라는 것. 내 피가 먼저 반응하며 그것을 전해주고 있었다.
섭섭했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상대를 향한 판단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내가 상대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이해하게 된 덕분이었다.
헤세는 별을 보며, 책을 읽으며 진리를 찾다가 마침내 자신의 몸속에서 흐르는 피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이제야 조금 이해된다.
진리는 멀리 있지 않다. 오늘 하루,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난 작은 일들 안에 있다. 섭섭했던 그 감정 안에, 잠깐 멈추었던 그 순간 안에, 스스로에게 조용히 던진 질문 안에.
삶은 매일 배우는 학교 같다. 교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그대로 수업이 된다. 책 속의 박제된 진리가 아니라, 오늘 내가 느낀 사소한 감정의 굴곡에서 더 큰 진리를 배운다.
김종원 작가의 말처럼, 사는 나날은 결국 죽음에 다가가는 나날이다.
그 말이 처음엔 쓸쓸하게 들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읽힌다. 죽음에 다가가는 나날이기에,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 것인가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섭섭함에 휘둘려 관계를 흐릴 것인가, 아니면 그 불편한 감정을 지렛대 삼아 내 마음의 그릇을 한 뼘 더 넓힐 것인가. 우리는 이런 선택을 매일, 아주 사소한 순간마다 하며 살아간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면, 그 나날은 단순히 시간이 지나가는 하루가 아니다. 조금씩 깨달음이 깊어지는 성장의 시간이 된다.
살아온 날들, 앞으로 살아갈 날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오늘. 결국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매일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러니 오늘, 한 번쯤 멈추어 보자.
바깥에서 답을 찾으려 달려가기 전에, 내 안의 목소리에 먼저 귀를 기울여 보자.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몸속에서 흐르는 피는 어떤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가.
가장 위대한 가르침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우리가 그 소리를 아직 듣지 못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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