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487일]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72
사람들은 말한다. "매일 필사하고 글 쓰는 거, 정말 대단해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잠깐 멈추게 된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닌데, 왜인지 낯설다.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결혼 전, 사람들은 말했다.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다"라고. 그 말이 싫지 않았다.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지금 거울 속 여인은 강풍이 불어도 끄떡없어 보인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주부로 살아가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몸은 참 성실하게 그 흔적을 저장해 뒀다. 야무지게. 빠짐없이. 군데군데.
얼마 전, 옷장 정리를 하다가 오래된 옷들을 꺼냈다. "그때 몸매로 돌아가면 입어야지" 하고 수십 년째 붙들고 있던 옷들. 꺼내서 펼쳐봤더니. 인형 옷이었다. 이 작은 옷에 내 몸이 들어갔다니. 신기해서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혼자 웃었다. 그래, 이제 보내줄 때가 됐다. 대신 이것 하나만 바라기로 했다. 여기서 더 비대해지지는 말자고. ㅋㅋ
그런데 그 웃음 뒤에 작은 깨달음이 왔다. 그 몸도 내가 만든 결과였다. 내가 선택한 군것질과 야식, 내가 포기한 아침 산책, 숨쉬기 운동만 해 온 사소한 선택들이 하나씩 쌓여 지금의 내가 탄생했다. 탓할 사람이 없었다. 근데 신기하게도, 그게 오히려 나를 일으켜 세웠다. 지금 이 모습이 과거의 내가 만든 결과라면, 지금부터의 나도 내가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다시 시작했다. 걷기와 댄스, 해독체조로 몸을 굴리고, 필사와 글쓰기로 머리도 굴리기 시작했다. 거창하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매일 아침 책상에 앉았다. 누가 시키지도 감시하지도 않는다. 처음엔 하루가 됐고, 그게 일주일이 됐고, 어느새 루틴이 됐다. 하루라도 거르면 마음 한구석이 편하지 않다. 이건 이미 '노력'이 아니라 '호흡'이 됐다.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는 말했다.
자신이 성취한 모든 일은 자기만의 척도로 측정해야 한다. 이 문장이 처음엔 그냥 좋은 말이었다. 그런데 매일 한 문장씩 손으로 옮기다 보니, 이 말이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들어왔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야식을 먹은 날도, 조용히 책상에 앉은 날도. 몸은 모두 다 기억하고 있다. 그 인형 옷이 증거다. ㅋㅋ
지금 나의 척도는 단순하다. 어제보다 한 문장 더 깊이 읽었는가. 어제보다 조금 더 정직하게 움직였는가. 인형 옷이 다시 맞는 몸으로 돌아가고 싶은 게 아니다. 솔직히 그때로 돌아가면 지금의 내공이 없잖은가.
주름도 없고, 연륜도 없고, 이 유머도 없었을 거다. 지금의 나로부터, 어제보다 조금 나은 내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대단하지 않아도. 내가 내 하루를 어떻게 채웠는지, 나는 알고 있다. 내 몸이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다. 그게 나만의 척도가 됐다.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혹시 옷장 한편에 "언젠가 입을 거야" 하고 붙들고 있는 옷이 있는가. 그 옷을 오늘 한번 꺼내보길 바란다. 인형 옷이면, 같이 웃자. 그리고 이것만 기억했으면 한다. 그 몸, 네가 만든 거 맞다. 근데 지금 이 몸도, 네가 살아온 증거다.
그리고 내일의 몸도, 오늘의 네가 만들어가고 있다. 타인의 눈금을 내려놓는 순간, 비로소 자기 삶의 리듬이 시작된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아도 괜찮다. 단단하게 서 있는 것도, 꽤 멋진 일이니까. 그리고 솔직히, 이 정도면 우리 꽤 잘 살아온 거 아닌가. ㅋㅋ
https://open.kakao.com/o/gWx0m5Wh